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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학문을 제자리에 놓기

손봉호 | 기사입력 2018/12/17 [08:33]

[손봉호의 시대읽기] 학문을 제자리에 놓기

손봉호 | 입력 : 2018/12/17 [08:33]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학문의 봉사’란 표현은 얼핏 보면 별로 특이하지 않지만 좀 더 따져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학문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계화된 지식이며 전업 학자들의 고유 영역이다. 학문은 그 전통이 처음 시작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최근까지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칸트의 이성 비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등은 어떤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 등과는 전혀 무관하게 연구되고 발견되었다.

 

이해에 관심 없는 관조(disinterested contemplation) 혹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thaumazein; wonder)에서 발견하고 제시된 이론이나 ‘사실’(facts)일 뿐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이념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어떤 실용적인 ‘가치’(values)를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적 진리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물이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이나 불교인에게 모두 동일하고, 보수와 진보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학문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태도는 대학에 실용적인 학과목이 도입된 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어 왔다. 최근까지도 아는 것 자체를 위한 ‘순수 학문’ 혹은 ‘과학’(science)과 그것을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응용 학문’ 혹은 ‘기술’(technology)은 엄격하게 구별되었고, 전자는 인문대나 자연대에서, 후자는 경영대나 공대에서 교육되고 연구되었다. 일반적으로 ‘봉사’란 특정한 목적을 이루는 데 돕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학문’이 ‘봉사’한다는 말은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당연하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순수 학문’은 ‘봉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관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순수 학문과 응용 학문, 과학과 기술의 구별이 희미해져서 이제는 ‘과학기술’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수학과 이론물리학, 철학 등 순수 학문 분야는 아직도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학문이란 단순히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란 생각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진리 그 자체를 위한 진리 추구보다는 당장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언젠가는 매우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기술 상당수는 기초과학 연구가 없었더라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 순수 학문분야의 성취에만 수여되었던 노벨상도 요즘은 점점 더 실용적 가치를 고려하는 것 같다.  

 

물론 학문의 이런 ‘타락’에 대해서 반항이 없지 않았다. 20세기 전반부에는 이런 변화를 ‘이성의 도구화’로 규정하고 학문의 규범적이고 비판적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개탄하는 사상가들이 있었고 (Horkheimer, Adorno 등 Frankfurt학파), 그들의 지적에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금은 학문이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 추구되고 있고 특히 돈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돈이 없거나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학문 연구가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단순한 연구는 이미 다 이뤄져 버려서 이제는 큰 비용을 요구하는 분야만 남아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성경적 관점에서는 어떤 진리나 사실도 그 자체로 절대적일 수 없고 어떤 이론도 그 자체로 엄격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다. 학문적 진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객관적이란 관점 그 자체에도 이미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아는 것이 곧 힘”이란 베이컨(F. Bacon)의 주장이나 “안다는 것은 예측하기 위함이다”라고 한 콩트(A. Comte)의 지적은 지식의 능력에 대해서 일종의 종교적 신뢰가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콘퍼드(F. M. Cornford)의 책 제목 <종교로부터 철학으로 >(From Religion to Philosophy)가 그런 요소를 보여 주고 있다.  

 

성경적 입장은 어떤 사실이나 진리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진정한 행복에 도움이 될 때만 가치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발견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옳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냈기 때문이고, 칸트의 철학이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를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올바로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학문의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경향은 그 자체로 성경적 관점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실용적인 목적을 오늘날처럼 주로 경제적 이익에 두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기독교 학문은 올바른 목적을 위하여 추구되어야 한다.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어야 가치가 있다. 물론 ‘기독교 학문’은 아직도 확고한 자리를 얻어 놓은 것은 아니다. 칸트가 철학’(Philosophie)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철학 함’(philosophieren)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학문’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으로 하는 학문이 공헌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학문”이 이제까지 누려 왔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모든 거짓 권위를 폭로하고 지금 추구되는 잘못된 목적을 비판하는 것이다. 창조 교리가 자연에서 신적인 요소를 제거했고, 출애굽 사건이 국가가 누려 왔던 신적인 권위를 허문 것처럼, 기독교적 학문 활동도 학문적 지식은 모든 가치와 이념을 초월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제거하고 그 능력에 적절한 위치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학문이 경제적 이익에 봉사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학문이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를 제시해 주는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선택하고 결정한 목적을 위하여 유용하게 이용하는 심부름꾼임을 밝혀 주는 것도 필요하다. 즉 학문을 제자리에 놓는 것이다. 이런 봉사는 오직 참된 절대자를 알고 섬기는 그리스도인 학자들만이 수행할 수 있고 또한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아닐 수 없다. 지식의 우상과 돈의 우상을 같이 제거해야 학문의 참 위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을 신성시했을 때는 자연과학이 발달될 수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자연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성경적 세계관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실험을 감행할 수 있었고 오늘과 같은 자연과학이 발달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신격화되어 있는 학문을 비신격화하는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학문이 건전하게 발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기독교 학자들이 할 수 있는 봉사 중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나 한다. 

 

비판하려면 알아야 한다. 기독교 학자들은 자신들의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도 충분히 갖추어야 하고 새로운 것도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문의 성격과 위치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학자들은 학문을 하나의 ‘게임’으로 취급하라고 권한다. 학문이 ‘게임’인 이유는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장기나 바둑처럼 사람들이 약속해서 만든 규칙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이다. 학문을 하나의 ‘관념의 유희’(play with ideas)로 취급할 때 학자는 더 창조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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