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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순수하고 정직한 아름다움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2/25 [08:54]

[손봉호의 시대읽기] 순수하고 정직한 아름다움

손봉호 | 입력 : 2019/02/25 [08:54]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네덜란드 유학 때 기독교 미술사학자 로크마커(Hans Rookmaaker) 교수의 강의를 청강한 일이 있다. 하루는 어떤 화가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를 슬라이드로 비추어 주면서 “이건 춘화(pornography)야!”라고 그가 외쳤다. 학생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로크마커 교수는 2차 대전에 네덜란드 해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독일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같이 잡혀 온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 메커스(J. P. A. Mekkes)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고, 자신의 부인을 통해 쉐퍼 박사를 만나 네덜란드 라브리(L'Abri)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전도와 구제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카이퍼와 도여베르트의 개혁주의에 충실했다. 그는 재즈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그에 대한 책을 썼고, 서양 근대 미술에 일가견을 가진 미술사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그린 그림을 춘화라 했으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그림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나는 그림을 보는 안목이 없어 그 그림이 왜 춘화란 악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그림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로크마커가 프랑스의 가톨릭 화가 루오(G. H. Rouault)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 화가라 한 것을 고려하면, 그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에서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 화가로 알려진 루오는 그림의 소재로 성경적인 것이 많지만 다른 소재의 그림에서도 누구든지 순수성과 진실성을 느낄 수 있고 경건한 마음이 생겨난다. 로크마커가 춘화라고 악평한 그 그림에는 그런 순수성과 진정한 영적 깊이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감성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과 진실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모든 예술이 다 거짓이라 했고, 백남준도 예술은 사기라고 했다. 그런데 그림이 어떻게 진지하며 순수할 수 있는가? 

 

객관적 사실에 충실한 것이 예술의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술은 감정에 충실해야 하고 느낀 것을 정직하게 표현해야 한다. 물론 감정 그 자체가 아름답고 고상해야 좋은 예술 작품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감정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이 정직하게 나타나지 않고 과장되거나 인기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면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없다. 

 

백남준이나 와일드가 예술을 거짓이라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예술적 감정이 순수하지 않거나 그들 자신의 작품이 그들의 감정에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 것은 아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감각에 철저히 충실한 작품을 창조해도 감상하는 사람이 작가와 꼭 같은 느낌을 받거나 같은 해석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감상이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술 작품은 잘못 감상할 권리가 있다는 말도 있다. 

 

예술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와 위치를 갖게 되고, 그에 대해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혹은 사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작가나 감상자가 사기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자적인 사기는 돈을 벌기 위해 자기가 느낀 것을 과장하거나 자신의 예술적 감각과 무관하게 인기에 영합하거나 돈 있는 사람의 구미에 맞게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회에서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 가끔 가성으로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평소에 내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음성과 리듬으로 감정을 과장해서 격하게 표현하거나 미사여구를 동원해 웅변적으로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벌벌 떨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기도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기도다. 여간 지겹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마음에 없는 말을 듣기 좋으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역겨워서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귀를 막아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의 속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오죽하시겠는가. 예술가의 작품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한다. 

 

기독교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더 순수하고 정직해야 한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고상하면, 그리고 그것을 누구든지 같이 느낄 수 있도록 잘 표현하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느낌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예수님, 십자가, 교회가 많이 등장하더라도 거기에 순수함과 진지함이 결여되면 춘화가 될 수 있고, 소재가 성경과 무관해도 작가의 마음이 진실하고 경건하면 루오의 그림처럼 보는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숭고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스도인 문필가나 음악인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하나님께 향해 있지도 않으면서 그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만 성경적이면 그게 복음성가가 되겠으며, 그런 노래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사람 들으라고 부르는 성가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역겨울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더라도 순수한 감정과 정직한 표현이 기독교 예술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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