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기독교적 역사관과 창조적 상상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3/04 [09:13]

[손봉호의 시대읽기] 기독교적 역사관과 창조적 상상

손봉호 | 입력 : 2019/03/04 [09:13]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상상이란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mental picture)을 뜻한다. 책을 읽을 때나 다른 사람이 하는 말도, 눈에 보이는 글자와 귀에 들리는 소리가 뜻하는 것을 마음속에 그려 보아야 이해할 수 있으므로 거기에도 상상이 작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림을 볼 때도 그 의미를 따지면 거기에도 상상이 작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않아도 멍하니 무엇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사람이 의식하는 것은 모두 상상이고, 인간의 정신 활동은 상상으로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상상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와 새로 들어온 정보를 아주 잘, 혹은 새롭게 연결하거나 새로운 그림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철학자 칸트는 머리 좋은 사람이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했다. 

 

요즘은 창조적인 상상력이 인기를 끈다. 아직 아무도 그려 보지 못한 그림을 그려 보는 능력이다. 기억능력은 디스크나 USB가 훨씬 강하고, 계산은 컴퓨터가 더 빠르고 정확하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요즘 별 쓸모가 없다. 디스크나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새로운 것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병을 고치고, 삶을 편리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한다. 문화를 한 단계 발전시킨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인은 역사가 발전하거나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있음을 부인했다. 전도서의 지적처럼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일어날 뿐, “해 아래 새것은 없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을 ‘순환적 역사관’ 혹은 ‘과거지향적 역사관’이라 부른다. 플라톤이나 사마천은 인류의 전성기, 즉 황금시대(golden age)는 과거에 있었다고 가르쳤다.

 

중국에는 그것을 요순지절(堯舜之節) 혹은 태평성대(太平聖代)라 불렀다. 그래도 발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치 콩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잎과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이미 주어진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바로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개발(develop, envelope와 반대) 혹은 진화(evolution)였다. 

 

없던 것이 새로 창조될 가능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에 창조를 자극하거나 장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본질과 자연에 대한 도전이기에 용납될 수 없었다. 그리스 사상가들이 가르친 이성(logos)은 본래 운명(moira) 사상에서 유래했다. 새로운 것이란 오히려 나빠지는 것이므로 경계하고 만류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와 로마 시인들은 시의 여신 뮤즈(Muse)가 시인의 마음에 들어와서(inspire) 말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의 많은 시의 첫 줄에 뮤즈를 초청하는 표현이 있다. 

 

이런 역사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이다. 그는 그런 역사관이 역사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기독교의 ‘선적 역사관’(linear view of history)과 대조되며, 선적인 역사관에서 비로소 ‘진보’가 인정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그것이 진보적 역사관을 가능하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과거지향적인 역사관은 서양에서는 17세기, 동양에서는 19세기까지 지배적이었다. 종교개혁의 영향이 상당할 정도로 뿌리내렸을 때 비로소 역사관이 미래 지향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때부터 사회와 사고는 ‘과거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것을 마음껏 상상하고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와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가 계속해서 자동으로 더 좋아진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말세에 사람들이 더 악해질 수 있고 믿는 자들이 많지도 않을 것이란 구절가르침도 있다. 그러므로 피상적인 낙관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와 종말의 교리는 미래지향성과 상대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그리고 인류는 그 가르침을 충분히 이용하고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지나치게 무시하고 무책임하게 자연을 착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현대인은 그들이 누리는 상상의 자유와 발전이 기독교적 유산임을 잊어버렸고 따라서 감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잘 모르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 위대한 유산을 누리고 이용할 권리가 있어서, 마음껏 상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쾌락과 편리가 아니라 사랑과 보존을 위해서 책임 있게 그 특권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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