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종교개혁을 기념할 자격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3/26 [08:07]

[손봉호의 시대읽기] 종교개혁을 기념할 자격

손봉호 | 입력 : 2019/03/26 [08:07]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기본 인권, 민주주의, 자연과학, 진보적 역사관 등 그 이후의 세계에 이룩한 공헌을 고려하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선물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감사하면서도 오늘의 세계 기독교가 과연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성경의 권위를 회복한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공헌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 열매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수준의 종교개혁은 반복될 필요가 없다. 다행하게도 한국 교회 대부분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전통적인 정통교리를 수호한다.

 

기본적인 원칙에는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개혁은 루터와 칼뱅의 개혁만큼 근본적이지는 않고, 그만큼 어렵지도 않다. 다만 말로만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의 행동과 삶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문화를 형성하면 개혁될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좀 더 충실하게 설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이 의도하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급한 것은 그때의 천주교보다 결코 덜 부패했다 할 수 없는 오늘의 한국 교회의 부패를 제거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에서 교회를 세습하고, 교단과 교계의 장이 되기 위해 돈을 뿌리고, 목사끼리 칼부림을 하고, 세상도 용납하지 않는 부정을 저지르고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교회는 한국 교회뿐이다.

 

범죄한 인간에게 이런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할 수도 있다. 자연에도 시간이 지나면 질서가 흐트러지는 엔트로피(entropy) 법칙이 있고, 십대의 공부방도 그대로 두면 조금씩 지저분해진다. 세월이 500년이나 흘렀으니 교회도 더러워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주장이 제시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한국 교회의 타락은 시간의 흐름에만 탓할 수는 없다. 같은 개신교회인데도 우리만큼 썩지 않은 교회가 대부분이다. 성경 말씀에 충실해 꾸준히 경계하고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즉시즉시 청소해서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가 타락하는 것은 주위 세상과 비슷해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돈, 권력, 명예 같은 세속적 가치가 교회를 지배하면 타락한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도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주위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고, 그런 일은 주로 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릴 때 일어났다. 종교개혁 때 천주교도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온갖 특권을 다 누릴 때였다.

 

한국 교회가 가난하고 핍박받는 소수였을 때는 순수했으나 세상 사람들이 다 가지고 싶어 하는 돈, 권력, 영향력을 가진 지배세력이 되자 타락하게 된 것이다. 물량적으로 커지니까 정부와 기업이 목사들의 눈치를 보고,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와 그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고, 기업인은 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사업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세속적인 성공이 영적 실패의 원인이 되고 만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돈이었다. 1517년 할버스타드와 마그데부르그의 젊은 주교였던 알베르트는 공석이 된 마인즈 교구까지 차지해 추기경이 될 야심을 품었다. 그는 막대한 돈을 교황에게 바치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마침 바티칸 궁전을 짓느라 빚더미에 앉은 교황 레오 10세와 짜고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한 돈을 반반씩 나누기로 했다. 그 면죄부가 루터가 토론 제목으로 제시한 95개 조항의 중요한 내용이었고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16세기에 비해서 오늘에는 돈의 위력이 훨씬 더 커졌다. 돈에 대한 유혹도 그만큼 커졌다. 권력, 명예, 쾌락, 신분, 심지어 지식, 사랑 등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 존재론적 유물론, 가치론적 물질주의, 정책으로서의 자본주의 등 오늘의 세상을 주도하는 사상의 핵심에 돈이 우뚝 서 있고, 오늘의 대표적인 우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동물적 욕망과 연결된 하급가치인 돈이 종교에 개입하면 종교는 예외 없이 타락해 마술(魔術)로 변질된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돈은 아합 시대 이스라엘에게 바알 신과 같은 위치에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그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문예출판사, 2010)에서 종교개혁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열심히 일해 많은 부를 생산했으나, 그 소득으로 사치하지 않고 수도원이 아닌 시장 한가운데서 “금욕”을 실천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개신교 지도자 웨슬리는 그렇게 축적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고 설교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의 생활 철학은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많은 소득을 올리면서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면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도 그런 생활방식을 채택하면 돈의 우상을 물리칠 수 있고 점점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으며 쾌락중심의 문화를 비판하고 자연 파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과 견줄 수는 없지만, 한국 교회의 개혁도 교회뿐만 아니라 점점 각박해지고 있는 한국 사회와 타락하고 있는 현대문화를 치유하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개혁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교리도, 기본 신조도 바꿀 필요가 없고, 교회 제도도 조금만 수정하면 된다. 다만 바울이 “우상숭배”(골 3:5)요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경고한 돈에 대한 탐심만 절제하면 된다. 그 절제는 우리 자신이 훌륭한 도덕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이웃의 고통을 줄여 주는 사랑의 절제다. 이렇게 쉬운 개혁도 성취하지 못한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할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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