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종교개혁과 경제 정의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4/08 [08:05]

[손봉호의 시대읽기] 종교개혁과 경제 정의

손봉호 | 입력 : 2019/04/08 [08:05]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클린턴 후보는 “역시 경제야!”(Stupid, it’s economy)라는 슬로건을 걸고 선거운동을 하여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선거에는 역시 경제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어야 표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세상에서는 정치, 과학기술, 학문, 교육, 연예, 스포츠, 심지어 종교까지 경제의 지배를 받고 있다. 역사상 경제가 이렇게까지 중요한 때는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돈의 가치는 공유불가능(共有不可能, zero-sum)한 하급가치다. 돈은 경쟁을 유발하고 경쟁의 패자는 항상 약자다. 약자는 경쟁에 지고, 경쟁에 지기 때문에 약자가 된다. 그런데 경쟁에는 항상 부정의 유혹이 따른다.

 

정직하기로 유명했던 독일에도 폭스바겐 자동차가 소비자를 우롱하고 미국에서는 리먼브러더스 사건이 벌어졌다. 경쟁이 공정하지 못하면 약자의 고통은 그만큼 더 커진다. 경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에 가장 요구되는 것이 경제윤리며 경제 정의다. 요즘 제기되는 정의 논의는 보응의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니라 전적으로 분배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란 사실도 이런 요구를 반영한다.  

 

최초로 정의를 이론적으로 다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正義)를 “같은 경우는 같이 취급하고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라고 정의(定義)했다. 그런데 그는 귀족과 노예는 다르므로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와는 달리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재하는 안건 사회에서는 항상 빈부, 남녀, 귀천, 유ㆍ무식 등의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정의를 위한 기독교적 노력은 이 차이를 가능한 한 줄이고 제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고아, 과부, 객(이방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인, 소외된 자 등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동안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확대해 놓았고,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은 이를 극대화하고 있다. 영국의 유서 깊은 구호단체 옥스팜(Oxfam) 대표는 지금 전 세계의 부 절반을 62명이 누리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1퍼센트가 전체 부의 99퍼센트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빈부격차가 커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노동을 통해서 버는 돈보다 돈을 통해서 버는 돈의 액수가 더 커졌다는 사실이다. 무능하고 게을러도 돈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는 자본주의가 종교개혁, 특히 칼뱅주의에서 태동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견이 없지 않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그 주장을 다시 한 번 따져 보아야 한다. 루터의 소명론(召命論)과 칼뱅의 예정론에 근거해서 신자들은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소명이고 그 직업에 성공하는 것이 곧 자신이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노동해서 많이 생산했으나 철저히 절제하여 부를 축적했다. 거기다가 칼뱅은 이자 받는 것을 허용했으므로 상업이 번창했고 돈이 돈을 버는 오늘의 상황에 단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직업에서의 성공을 곧 예정의 증거로 보았다는 베버의 주장에는 이의가 많다. 그러나 소명론, 근검절약, 이자 허용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고, 칼뱅주의가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 할 수는 없어도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의 개신교인들은 자본주의의 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칼뱅이 이자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에서 돈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sterile)고 보았고, 중세 교회는 꾸어 준 돈에 대해서 이자 받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그런데 칼뱅은 상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그 시대에 돈을 빌려 사업을 해 빌린 돈보다 더 큰 돈을 만드는 경우가 엄연히 있는데도 돈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약의 명령은 신약시대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무조건 이자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전적 부패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칼뱅은 이자 허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자를 허용하되 일곱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자에게 꾸어 주었을 때와 사업에서 이익을 남기지 못했을 때, 공익에 어긋날 때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며, 국가에서 정해 놓은 이율을 초과할 수도 없고, 대금을 받는 것이 직업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면 돈이 돈을 버는 오늘의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게 되어있다. 사실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외 조항을 둔 중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세계는 경제에 관한 개혁자들의 가르침 중에 가난한 자를 배려하고 공익에 관심을 쏟으며, 돈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고 대금 그 자체가 직업이 되지 못하게 한 것, 부지런히 일하고 사치를 금한 것 등 정의로운 경제활동에 대한 것은 거의 다 무시하고 다만 이자를 허용한 것만 잘 수행한다.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했더라면 오늘의 자본주의가 이렇게 위험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 개신교는 현대 사회가 무시해 버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회복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이익과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며 무엇보다 더 절제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세계내적 금욕”를 실천했다는 베버의 주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모든 절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고, 이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는 현대 사회에서 윤리적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 모든 윤리는 정의로 환원되며, 약자를 착취하지 않고 보호하는 것이 기독교 정의의 핵심이다. 이런 정의가 무시되면 자본주의는 약자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대한 재앙이 되고 말 것이다. 

 

독일 신학자 그른드만(W. Grundmann)은 헬레니즘의 절제는 행위자 자신이 고상한 품격을 갖추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성경의 절제는 이웃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했다. 모든 이웃에게 이익을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고통당하고 있는 연약한 이웃에게 고통을 더하는 악은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정하게 행동하고 사회 구조도 정의롭게 고쳐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청춘 19/04/11 [17:12] 수정 삭제  
  너무멋진글이네요!!
청춘 19/04/11 [17:12] 수정 삭제  
  지혜에 감탄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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