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민중의 힘으로 부패권력 끌어내린 4·19혁명

헌정농단 일삼은 자유당의 패퇴, 민중은 위대했다

성상영 기자 | 기사입력 2019/04/19 [17:43]

민중의 힘으로 부패권력 끌어내린 4·19혁명

헌정농단 일삼은 자유당의 패퇴, 민중은 위대했다

성상영 기자 | 입력 : 2019/04/19 [17:43]

4·19혁명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궐기해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꾸짖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 사건이다. 우리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음과 동시에 4·19혁명의 이념을 계승한다고 적는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시신

물결치는 민중의 분노… 자유당 정권의 붕괴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1회 중임 제한을 폐지한 19541129일 개정 헌법이다. 피난 중 발췌개헌을 통해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사실상의 종신집권을 위해 또다시 헌법을 고쳤다. 그것도 사사오입이라는 기막힌 논리를 끌어왔다.

 

1960315일 열린 제3대 정·부통령 선거는 그렇게 치러졌다.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내세웠다. 부정선거의 징후는 보름 전부터 포착됐다. 정부는 학생들의 대선후보 유세장 참여를 막으려고 일요일 등교를 명령했다. 228일 대구에서는 이에 반발한 고교생 10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이승만 정권을 향한 반감은 커졌다. 이미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위기를 느낀 자유당은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한다. 투표함을 밤에 몰래 바꿔치기하거나 미리 이승만·이기붕에 기표한 용지를 대량 투표함에 집어넣는 식이었다. 유권자보다 투표용지가 더 많이 나온 선거구도 있었다. 부정선거 결과 이승만은 85%, 이기붕이 75%를 얻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3·15부정선거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곳은 마산이었다. 마산에서는 민주당 마산시당의 주도로 낮부터 시위가 벌어졌다. 밤까지 이어진 시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졌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관공서와 자유당사를 습격했다. 경찰은 무력을 이용해 시민들을 진입했다. 이후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정적인 순간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1960411일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에서 머리에 최루탄이 관통한 시신 한 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시신의 주인공은 마산상고 입학을 앞두고 3·15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김주열 열사. 마산시민들은 죽은 자식을 내놓으라거나 이승만은 물러가라며 다시 일어났다.

 

이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부산과 광주, 대전, 청주, 서울에서 고등학생들을 주축으로 시위가 일었다. 서울에서는 시내 10여 개 대학의 학생들이 대열에 합류했다. 드디어 419일 전국에서 지역별로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봉기했다. 구두 닦는 사람, 전차 매표원, 음식점 종업원, 넝마 줍는 사람까지 직업과 지위를 막론하고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퇴진을 외쳤다.

 

25일에는 서울에서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과 함께 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더 이상 사태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26일 대통령직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수많은 시민이 피를 흘리며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

 

문화저널21 성상영 기자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