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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의 시대읽기] 종교개혁과 이웃 사랑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4/23 [08:13]

[손봉호의 시대읽기] 종교개혁과 이웃 사랑

손봉호 | 입력 : 2019/04/23 [08:13]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될 만큼 지지를 얻고, 영국이 EU를 탈퇴하기로 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언론들은 그것이 실패한 백인들의 불만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와 지나치게 발달한 과학기술이 세계 도처에서 심각한 양극화를 불러왔다. 첨단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소수만 떼 부자가 되고 나머지 다수는 실직자로 전락한 것이다. 이제까지 거의 절대  선으로 간주되어 왔던 민주주의도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수의 소외 못지않게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도 이번 현상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멕시코 이민자와 시리아 난민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무시되고 집단이기주의가 크게 강화된 것이다. 성경도 읽지 않고 설교도 듣지 않으니 예수님의 고귀한 사랑과 가치는 희미해지고 동물적인 소유욕과 쾌락주의만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비교적 신사적이고 정의로웠던 두 나라가 이제는 자신들의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 자존심도 다 버리고 2등 국가로 전락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물론 난민에 대해서 세계에서 가장 인색한 우리나라와 이에 대해서 아무 감각도 없는 한국 교회로서는 그들 나라를 비판할 어떤 자격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미국이나 영국처럼 외국 노동자들과 난민들이 대거 몰려왔다면 아마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국수주의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미국과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인류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징조인 것 같아 걱정된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이웃이란 우리가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뿐만 아니라 그 사마리아인에게도 낯선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직 그에게 긍휼을 베푼 사마리아인에게만 이웃이 되었다. 물론 성경이 ‘이웃’이란 말을 항상 그런 뜻으로 일관성 있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웃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셨던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지만 특별히 강도 만난 사람같이 우리의 도움을 매우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란 가르침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며, 그런 점에서 ‘긍휼’과 ‘정의’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같은 것은 같이 취급하는 것”(to treat the like alike)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에서는 사랑과 정의가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 같은 임금을 주는 것은 상식적인 정의에는 어긋난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넉넉하고 건강한 반면 한 시간 일한 사람이 가난해서 굶는다면 같은 액수의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성경적 정의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바로 정의라 할 수 있다. 

 

종교 개혁자 칼뱅은 사유 재산도 옹호하고 이자도 허용하며 부의 축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함으로(이것은 칼뱅이 아니라 칼뱅의 일부 추종자들의 주장인 것으로 드러남) 자본주의를 싹트게 했다고 베버와 토니(R. H. Tawney)가 주장했다. 그러나 칼뱅의 사회사상을 연구한 비엘러(A. Bieler)는 칼뱅 사상을 ‘사회적 인간주의’로, 트뢸치(E. Troeltsch)는 ‘기독교적 사회주의’라 했다. 그 어느 주장도 칼뱅의 사상을 완전히 대변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칼뱅이 경제적인 부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도행전 11장 29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재산을 허락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의 종’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부자와 빈자가 같이 살게 하신 것은 그들이 같이 만나서 교제하며 부자는 주고 빈자는 받도록 하게 함이라 했다. 칼뱅이 사치를 극도로 배격하고 철저하게 절제를 강조한 것이나, 생활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이 빌려 간 돈에 대해서는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을 고려하면 그가 자신만의 쾌락을 위한 부, 부 자체를 위한 치부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부자가 되고 빈자가 되는 것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회구조 때문이라면 빈자에 대한 부자의 책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세계 개신교인의 87퍼센트가 선진국과 중진국에 살고 있다. 개신교는 그만큼 경제, 정치, 문화 발전에 공헌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더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은 종교개혁의 덕일진대 그들은 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자신들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사닥다리를 걷어차기 시작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성경이 가르치고 종교개혁이 되살린 중요한 가르침들은 직간접적으로 한국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만약 한국이 종교개혁 정신으로 발전한 나라들의 정치와 경제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개신교를 수용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오늘만큼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 전통의 핵심에는 이웃 사랑이 있고 그것을 제거하면 종교개혁 정신은 빈 껍질만 남을 것이다. 

 

한국과 한국 교회는 그 중요한 이웃 사랑을 북한 주민에게도 실천해야 한다. 우리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북한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도 아니고 경제적인 대박을 터트리기 위함도 아니다.

 

바로 지척에서 억눌림과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이 기본 자유를 누리고 생존과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먹고 입을 수 있게 되기 위함이라야 한다. 만약 북한이 개혁되어 주민들의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을 만큼 넉넉해진다면 우리는 구태여 통일을 추구할 이유가 없고, 그런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통일은 추구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야 한다”라고 주장한 키케로(Cicero)의 말은 가끔 독재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지만 그 자체로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서는 역효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어떤 법, 이념, 제도도 무시하고 상대화할 수 있다. 인간의 생존과 정의는 어떤 이유로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새터민과 외국 근로자들도 우리의 중요한 이웃들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지금 바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따뜻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매우 뜻 있게 기념하는 중요한 방식이 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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