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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정경 / 이완근

서대선 | 기사입력 2019/05/06 [07:49]

[이 아침의 시] 정경 / 이완근

서대선 | 입력 : 2019/05/06 [07:49]

정경

 

지하철 안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 한 분이 꾸부정하게

일어나

둘둘말은 신문지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할머니 어깨를

툭, 건드린다

겸연쩍은 할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할아버지 뒤를 바짝 따라 내리는,

정겨운 어느 겨울 오후

 

# '호저(porcupine) 사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필요하다. 가시 털을 가진 동물인 호저에겐 서로 상대를 찌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임계거리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임계거리가 필요하다. 사람 사이의 임계거리는 심리적 거리로 결정된다. 심리적 거리는 타인의 침입과 간섭으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공격성과 파괴적인 성적욕구가 튀어나가 상대를 해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거리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합체 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경우 지하철 안에서도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서로 끌어안고 있다. ‘실존적 불안’을 잠시나마 잊고자 하는 모습들이다. 사랑에 빠지게 된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서로 지켜야 할 임계거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상대의 본래의 모습을  존중해 주는 것, 상대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심리적 공간이 든 인정해 주고 지켜 주는 것이 노부부처럼 오래 해로 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 안, 통로를 사이에 두고 노부부로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따로 떨어져 앉아 계신다. 물리적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노부부의 심리적 거리는 안전하고도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 한 분이 꾸부정하게/일어나/둘둘말은 신문지로/건너편에 앉아 있던 할머니 어깨를/툭, 건드”리는 그 물리적 공간 속에서 “둘둘 말은 신문지”는 그냥 신문지가 아니라 길게 늘어난 할아버지의 손이다. 그 손길에 호저의 가시는 보이지 않는다. 신뢰 가득한 할아버지의 심리적 손길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할아버지 뒤를 바짝 따라 내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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