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약자 보호가 정의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5/13 [08:16]

[손봉호의 시대읽기] 약자 보호가 정의

손봉호 | 입력 : 2019/05/13 [08:16]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대통령과 국가가 감당해야 할 일은 국방과 외교, 치안 외에도 경제, 복지, 교육, 문화 등 수없이 많고, 종교가 타락하면 종교에까지 간섭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분야에 아무리 크게 성공하더라도 사회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면 국가는 자격을 잃을 뿐 아니라 다른 기능들조차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질서 유지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이며 국가가 존재하는 기본 이유다. 국가의 권한을 정당화하기 위해 홉스(Thomas Hobbes)가 제시한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국가란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약육강식의 무질서를 막기 위해 자신들의 자유 일부를 양보하고 자신들을 통제하도록 만든 거대한 괴물(Leviathan)이다. 

 

진정한 질서는 강력한 공권력만 행사하면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정의가 확립되어야 가능하다. 정의의 가장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모습은 로마서 13장 4절이 지적하는 것처럼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응하는 것”이다. 선에 대해 상을 주고 은혜를 갚는 것도 정의의 한 요소이지만, 그보다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악에 대해 보응하고 복수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면 억울해한다. 억울함의 기준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억울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억울함을 당하면 보복하려 한다. 루소(J. J. Rousseau)의 제자 이타드(Itard)는 야생 소년 빅토르가 억울한 처벌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을 보고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억울한 처사가 없었다면 정의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정의의 개념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철학자 밀(J. S. Mill)이 지적한 것처럼 ‘정의롭지 못한 상황’(injustice)이 벌어지기 때문에 정의 (justice) 가 필요하고 정의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다. 

 

억울함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당하게 해를 끼쳤을 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분배 받지 못했을 때도 느낀다. 이것 역시 정당한 권리의 침해이며 억울함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노동하고 임금을 받지 못했거나 공동의 부를 상대적으로 적게 분배 받았을 때도 우리는 억울해한다. 그래서 악에 대해서 복수하는 보응의 정의(retributive justice)뿐만 아니라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분배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도 중요하고, 경제적인 가치가 중요해진 오늘날에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복수와 분배를 개인에게 맡기면 충분하게 공정하지 못한 결과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보응 혹은 보상과 분배가 지나치게 적어서 억울함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나치게 커서 또 다른 억울함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서 공정한 보응과 분배를 수행할 힘을 가진 기관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법을 제정하고 그 법에 따라서 보응, 보상, 분배함으로 그 역할을 감당한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그 법의 제정에 간접적이지만 참여함으로 그 법과 권위를 인정하고 그 결정에 순응한다. 운동경기에서 선수가 경기 규칙을 지키는 것은 그 경기에 참여할 때 그 경기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존중하기로 약속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이기에 그 약속에 매이는 것이 정의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같이 투표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을 어기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독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약자다. 억울함을 당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이 약자란 사실을 함축한다. 교통질서는 탱크나 덤프트럭 같은 강자에게는 귀찮은 것이지만 보행자와 자전거, 소형 자동차 운전자 등 약자들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약자들이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된다. 그 외에도 보이스피싱, 저축은행 비리의 피해자들도 주로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다. 정의란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보응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정의가 무엇인가?” 와 같은 추상적인 질문을 하거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론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명령을 내린다. 구약에서는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사 1:17)할 것을, 신약에서는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3)고 명령한다. 즉 그 사회에서 가장 홀대 받고 보호 받지 못하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질서, 나아가서 정당하게 제정된 법과 규칙을 지키는 것,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며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복지제도도 정의의 한 요소이므로 복지를 위한 납세와 자발적인 나눔도 정의에 공헌하는 것이다. 반대로 법과 규칙을 어기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약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정의에 어긋난다.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당한 법과 규칙을 지키고 정직하게 납세하며 도덕적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곧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정의에 충실한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