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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전 지키자” 불도저를 막은 꽃 한 송이의 힘

서울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를 가다

성상영 기자 | 기사입력 2019/05/17 [21:20]

“터전 지키자” 불도저를 막은 꽃 한 송이의 힘

서울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를 가다

성상영 기자 | 입력 : 2019/05/17 [21:20]

▲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에 온 시민들이 '하모니뜰'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성상영 기자

 

굴뚝의 연기, 고가도로와 함께 높이 솟은 아파트는 1960년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미덕이자 바이블이었다. 서울이라는 좁은 땅덩이에 천만 명이 우글우글 모여 살려다 보니 빠끔한 곳 하나 없이 아파트가 들어섰다.

 

도시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재개발 시대가 열렸다. 한국의 재개발은 건설사가 벌이는 인클로저다. 굴러온 돈이 박혀있던 사람을 쫓아내는 식이다. 대개 산(buy) 사람은 웃고 사는(live) 사람은 운다. 그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의 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면 돈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런 재개발 열풍도 조선 태조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하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 주민들은 힘을 모아 마을을 지켜냈다. 흔히 교수단지라고 불리는 이곳은 도시철도 우이신설선 정릉역에서 내려 10여 분을 걸어가면, 아파트 숲 가운데 비탈을 따라 보이는 동네다.

 

▲ 서울 성북구 정릉 제6구역에서 내려다본 모습. 조선 태조 신덕왕후의 능인 이곳 턱밑까지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 성상영 기자

 

◇ 주민들의 손으로 멈춘 재개발 광풍

 

정릉 교수단지는 1970년대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이 문화재청으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조성한 단독주택 단지다. 터를 닦는 과정에 서울대 토목학과와 건축학과 교수들이 참여했다. 그런 만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잘 설계됐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권 다툼으로 고소전까지 벌어지면서 결국에는 교수단지라는 이름만 남고, 일반 시민들이 입주하게 됐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릉동에도 개발의 물결이 밀려왔다. 교수단지가 조성된 지 꼭 40년이 지난 200810정릉 제6구역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의 설립 인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주민들에게 들려왔다. 멀쩡한 주택을 밀고 대규모 아파트를 세운다는 것. 주민들은 찬반으로 갈렸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정릉을 사랑하는 모임(정사모)’를 만들었다. 곧 이들에게 매도청구소송이 들어왔다.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이라고 하면, 소위 철거 용역과 붉은 플래카드에 적힌 투쟁 구호, 심지어는 화염병까지 떠올리지만, 이곳 주민들은 평화로운 저항을 택했다. 정릉 교수단지의 보존 가치에 대한 온갖 증빙자료를 직접 모아 유네스코와 문화재청에 보냈다. 그 무렵 유네스코에서는 정릉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검토하고 있었다.

 

오랜 노력 끝에 2012년 재건축조합 설립이 취소됐다. 주민 20여 명이 2009재건축조합의 주민 동의율 계산에 문제가 있어 조합 설립 인가를 무효로 해달라며 낸 행정소송 결과, 대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 서울 성북구 정릉 교수단지의 '뜰사랑' 정원. 한국화 작품과 함께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성상영 기자

 

▲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에 온 시민들이 '하모니뜰'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 성상영 기자

 

◇ 교수단지 보존 운동이 남겨준 열린 공동체

 

이 과정에서 정릉마실이라는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우연히도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마을기업, 도시재생 같은 말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주민들은 성북구의 도시 아카데미과정을 듣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재개발 반대 이후를 고민했다. 결론은 마을을 가꿔보자는 것이었다. 재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기로 했다.

 

그러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 몇몇 주민들이 대문 밖에 화분을 걸고, 담벼락 아래 도로 경계석에 화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창기부터 마을 가꾸기에 참여한 김경숙(58) 씨는 단순히 재산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 마을이 쉽게 헐어버릴 정도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틈새 정원은 동네의 여러 집으로 확산했다.

 

교수단지 주민들에게 정원은 특별한 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집 마당에 꽃을 하나둘 심고 정성을 들이다 보니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가 됐다. 김 씨와 주민들이 힘을 합해 2014정원축제를 시작했다. 자신들의 개인 공간인 집을 축제 동안 열어놓은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던 대문과 담벼락은 역설적으로 개방과 공동체의 상징물로 변모했다.

 

정원축제에 참여하는 가구는 20여 가구다. 정원축제가 열리면서 집집이 이름이 붙었다. 김 씨의 집은 도도화. 어떤 집은 화단 가장자리에 돌멩이에 물레방아의 물소리가 더해졌다고 해 돌멩이들의 수다가 됐고, 또 다른 집은 조선 마지막 참봉의 후손이 살아서 참봉 후손댁으로 불린다.

 

▲ 정릉 교수단지 내 '도도화'의 담벼락. 정원 가꾸기가 처음 시작된 이 집은 주민 김경숙(58) 씨의 정성으로 아름답게 바뀌었다.     © 성상영 기자

 

▲ 지난 2014년 시작돼 올해 6번째를 맞은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를 안내하는 팸플릿.     © 성상영 기자


합리적인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답

 

올해 정원축제는 17일 개막했다. 저마다 특색을 가진 정원에서는 다양한 전시와 공연이 열리고 체험 활동이 진행된다. 꽃비빔밥과 부침개, ‘소떡(소시지와 가래떡을 꼬챙이에 꽂아 구운 음식)’ 등을 맛볼 수도 있다.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전 과정은 주민들의 손길을 거쳤다.

 

축제는 규모가 크지도, 시끌벅적하지도 않았다. 아이 손을 잡은 엄마부터 도시의 삭막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중년, 알음알음 친구들끼리 찾아온 대학생까지 발길이 이어졌다. 최근 부상한 여느 마을들과 달리 상업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와서 보고, 처음 본 주민들이지만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축제다.

 

축제 현장에서 만난 정경훈(45·서울 성북구 장위동) 씨는 지난해 처음 교수단지에 왔을 때 느꼈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정 씨는 이곳 사람들은 처음 봐도 인사를 하고, 서로 손을 잡고 다닌다그 모습이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사람 사는 냄새, 고향집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를 느낄 수 있다며 감상을 전했다. 교수단지 주민들은 합리적인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가 열리는 마을 입구에 걸린 재건축 조합 설립 동의서 제출을 촉구하는 현수막.     © 성상영 기자

 

▲ 정릉 교수단지로 들어가다 보면 처음 만나게 되는 '가훈 써주는 할아버지' 최용백(88) 옹이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붓글씨로 쓰고 있다.     © 성상영 기자

 

하지만 여전히 재개발의 불씨는 남았다. 재건축추진위원회가 남아있기 때문.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도 추진위가 건 조합 설립을 위한 동의서 제출 협조 요청현수막이다. 정릉 제6구역은 내년 3월까지 조합 설립 신청이 이뤄지지 않으면 재개발 구역에서 해제된다.

 

교수단지에서 40년간 살다 고향인 충남 서산으로 귀촌했다는 가훈 써주는 할아버지최용백(88) 옹은 견리사의(見利思義)’를 써주며 너무 지나치게 빨리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 옹이 쓴 글씨의 뜻은 눈앞에 이익이 의()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문화저널21 성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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