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정의의 요구가 만족되어야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6/03 [08:55]

[손봉호의 시대읽기] 정의의 요구가 만족되어야

손봉호 | 입력 : 2019/06/03 [08:55]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한국은 경제와 교육, 기술, 문화, 민주화 수준이 상당히 높은데도 국민의 행복지수는 매우 낮다.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고, 갈등지수는 두 번째로 높다. 세대와 이념, 지역, 노사, 여야가 분열되어 반목한다. 요즘은 가정도 깨어져서 이혼과 가출 문제가 심각하고 존속 살해도 빈번하다. 민족도 쪼개져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70년 가까이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한국 교계도 비슷하다. 사랑과 화평의 종교인 기독교는 사회를 조화롭고 화평하게 만드는 데 공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체의 평화와 연합도 이룩하지 못한다.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진 민족과 사회, 가정, 교회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고 나빠진 경기를 회복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기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어렵다. 계속 불행하게 사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분열과 갈등은 죄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본래의 관계를 흩트려 버렸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연을 다스려야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대신 뱀의 말을 믿고 순종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롬 1:25)으로 근본적인 질서를 파괴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자연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이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왜곡된다. 가인은 무고한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못했다.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보장하려고 시도하다 갈등의 문화를 창조했다. 

 

아담 부부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정상적인 관계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타락시켰다.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죄에는 항상 교만과 욕망이 작용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지혜와 판단이 더 옳고 정확하다는 교만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욕망이 모든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고, 대개 강자는 가해자가 되고 약자는 피해자가 된다. 공정하지 못한 과잉 이익과 그에 상응하는 억울함이 정의를 파괴한고 만다.

 

파괴된 관계가 회복되려면 정의의 요구가 만족되어야 한다. 가해자의 회개와 해악에 상응하는 처벌이 있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빙자하여 피해자의 무조건적 용서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만(마 18:22) “내가 회개하노라”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눅 17:4).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받는 사람에게도 해가 된다. 잘못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용서를 받으면 잘못을 고치지 않고 범죄를 반복해 이웃에게 또 해를 끼칠 것이다. 그런 용서가 관계 회복을 가져올 수 없다. 

 

진정한 회개는 느낌이나 생각,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이 가한 모든 손해를 배상하고 자신이 행한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을 감수하려 해야 한다. 삭개오는 누구의 재물을 토색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다. 율법은 두 배를 갚으라고 명령했으나(출 22:4) 삭개오는 그 두 배를 배상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회개가 전제되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정한 관계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살인범처럼 남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고도 자기는 용서받았다고 착각하는 뻔뻔함으로는 올바른 관계 회복이 일어날 수 없다. 

 

정의의 요구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분명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죄를 거저 용서하시지 않으신다.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시고 그 대가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게 하셨다. 두려운 요구며 무서운 대가였다. 우리가 진 빚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눅 12:59) 탕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심히 어렵다. 다윗처럼 총명한 사람도 나단이 지적하기 전에는 우리아에게 가한 악행을 털끝만큼도 알지 못했다. 분열과 갈등으로 신음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 가정이 회복되지 못하는 것은 묵살과 뻔뻔함, 핑계, 변명, 정당화, 맞대응만 판을 칠 뿐 진정한 회개가 없고 정의의 요구가 만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만과 탐욕이 우리의 눈을 겹겹이 가려 놓은 것이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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