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시대읽기] 가정의 주권과 교육

손봉호 | 기사입력 2019/07/08 [14:30]

[손봉호의 시대읽기] 가정의 주권과 교육

손봉호 | 입력 : 2019/07/08 [14:30]

손봉호 박사(사진)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는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현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사상가는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 언론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다. 그가 제시한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역주권(The Sphere of Sovereignty)이다.

 

이 사상은 하나님께서 사회의 영역을 통치할 권한을 국가에만 주신 것이 아니라 각 영역에 고유한 주권을 직접 주셨으며, 따라서 어느 영역도 다른 영역의 주권을 무시하거나 침범할 수 없게 하셨다는 주장을 내용으로 한다. 교회의 고유 권한인 종교 행위에 국가가 간섭할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 문제에 교회가 간섭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거의 한 세기 후인 1983년,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정의와 다원적 평등》(철학과현실사, 1999)이란 저서에서 유사한 주장을 제시한 바 있다. 비록 구체적인 내용은 다소 달랐지만, 덕분에 시대를 앞서 활동했던 카이퍼의 독창성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카이퍼가 언급한 영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교회, 가정이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 주권을 서로 침범하면 안 된다는 것은 정교분립이란 원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가정도 국가나 교회 못지않게 고유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사실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보면 그런 결론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부부나 부모-자녀 관계에 대해 국가나 교회가 간섭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건 너무나 분명하다. 물론 가족 간이라도 국가의 공권력이 개입해야 할 때도 있다. 신체적 혹은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등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부부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자녀 양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국가나 교회가 결정하거나 강요할 수 없음은 매우 당연하다. 

 

카이퍼가 영역주권을 주장하면서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영역은 놀랍게도 가정이었다. 사실 18세기에 국가가 종교에 간섭한다든지, 교회가 국가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은 이미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가정의 경우는 문제가 달랐다. 카이퍼는 당시 국가가 가정의 영역주권을 부당하게 침범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주장은 단순했다. 자녀 교육은 국가도 교회도 아닌 가정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교육을 총괄하는 것은 가정의 주권을 침범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지금도 홈스쿨링이 금지되어 있어서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교육하면 벌금을 물게 되어 있다. 카이퍼는 이러한 것을 가정의 영역주권을 국가가 부당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교육 과정과 내용을 국가가 결정하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일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세운 네덜란드 최초의 사립대학교를 ‘자유대학’이라 한 것은 국가와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학교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의 줄기찬 노력으로 네덜란드는 헌법을 바꿔 유럽 최초로 사립학교를 세우고, 부모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비용은 100퍼센트 국가가 담당하되 교육의 질과 수준만 감독할 뿐, 교사 채용이나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학교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유대학교도 다른 국립대학과 다름없이 국고 지원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정부는 학위 수준만 감독하고, 교수 임용과 강의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학법 개정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중고등학교의 입학을 추첨제로 하고 국가가 등록금 한도를 설정하는 등 사립학교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제한받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부가 교과 과정과 내용까지 결정한다. 카이퍼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의 주권이 전혀 존중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홈스쿨링이 허용된다는 점에서는 독일 등 대부분 유럽 국가들보다는 더 자유롭다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가정의 영역주권을 회복하려면 몇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기독교 학교가 운영의 투명성을 보증하고, 교육의 질이 월등하게 앞서야 한다. 또한, 기독교계는 물론 기독 교육계의 도덕적 권위가 확실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신앙에 입각한 교육의 자율성을 보장받거나 가정의 고유 권한을 요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국 교회는 자녀들의 올바른 양육과 교육을 위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 수록되었던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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