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복싱스토리] 79년 세계청소년대회 감춰진 이야기

79년 세계청소년대회 6전 전승 임창용과 가요계의 거장 김희갑·양인자 부부

조영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8/23 [21:40]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79년 세계청소년대회 감춰진 이야기

79년 세계청소년대회 6전 전승 임창용과 가요계의 거장 김희갑·양인자 부부

조영섭 기자 | 입력 : 2019/08/23 [21:40]

79년 세계청소년대회 6전 전승 임창용과 가요계의 거장 김희갑·양인자 부부 

 

며칠 전 천호체육관 임창용 관장과 함께 그가 평소 친분이 두터운 가요계의 국보급 작곡가인 김희갑, 양인자 선생을 만나러 청풍명월의 고장인 충북 제천으로 길을 나섰다. 임 관장과 마주하자 문득 시간의 수레바퀴가 40년 전으로 돌려지면서 제1회 세계청소년대회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979년 9월 문화체육관에서 제1회 세계청소년대회(요코하마) 선발전이 열렸다. 플라이급으로 출전한 임창용은 78년 대통령배와 79년 전국체전을 석권한 유승기(한국체대)를 비롯해 이승용(한국체대)과 김평국(60년.경상대)을 차례로 잡아내며 6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 1979년 세계청소년 대회 플라이급 에서 1승1패를 기록한 임창용(좌측)과 김평국 (사진=조영섭 기자) 


특이한 점은 상주고를 다니며 방과 후 인근의 점촌에 있는 체육관으로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복싱을 수련한 평범한 복서가 걷어 올린 금자탑이었기에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물 찬 제비’라는 닉네임처럼 전형적인 복싱의 4S(Speed.Strategy.Skill.Sense)를 갖춘 유망주로 떠오른 그는 11월의 최종평가전에서 유승기를 잡고 올라온 김평국과 결전을 벌인다. 그는 한번 꺽은 바 있었던 김평국 과의 리매치에서 열띤 타격전 끝에 판정패하면서 요코하마행 출전권를 놓친다.

 

당시 최종 확정된 우승자를 살펴보면 △라이트플라이급 홍동식(부산한일체) △플라이급 김평국(진주체) △밴텀급 박기철(전남체고) △페더급 오민근(천호상전) △라이트급 이영구(천호상전), △라이트웰터급 최우진(원광대) △웰터급 윤영태(인천체고) △라이트미들급 윤영복(오성체) △미들급 장한곤 (한영고) △라이트헤비급 소배원(이리상고)등 10명 이었다.

 

다만, 당시 국가대표인 관계로 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밴텀급의 지택림(한국체대)과 김광섭(대우개발)은 일주일 후 재 평가전을 갖는다는 조항이 첨부됐다. 

 

일주일 후 약속대로 태릉선수촌에서 평가전이 펼쳐진다. 전날 연락을 받은 김평국은 야간열차를 타고 부랴부랴 태릉에 도착하여 계체량을 통과했는데 김광섭은 불참하면서 자동탈락 됐고, 박기철과 지택림과의 밴텀급 한 경기만 치러져 박기철이 승리하며 막차로 본선 티켓을 확보해 김평국과 함께 남산에 있는 합숙소에 입성, 본선에 대비한 훈련을 시작한다.

 

▲ 왼쪽부터) 1979년 뉴욕 월드컵 플라이급 국가대표 김광섭, 청소년대표이자 국가대표 상비군출신의 김평국 중앙심판위원 (사진=조영섭 기자) 

 

이 때 연맹에서 김평국에게 김광섭과 재 평가전을 하라는 공문이 하달되자 김평국의 스승인 정현상 관장은 김광섭과 평가전은 불공정하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연맹에서는 김평국을 퇴촌시키고 김광섭을 입촌시킨다. 

 

김광섭이 소속된 광주체육관의 이재인(32년, 나주)선생은 56년부터 23년간 광주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박형춘·신양일·최송근·서정원·박기철·이남의·진행범·이현주·김동길·김종섭 등 특급선수들을 배출한 공로가 인정돼 조철제 전무에 의해 심판위원장에 임명되어 한국 아마복싱을 쥐락펴락 하며 급부상한 인물이었다. 

 

결국 코끼리와 메뚜기의 싸움 같은 조족지혈(鳥足之血)의 무력감에 김평국은 태극마크가 선명한 단복을 팽개치고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다. 김광섭은 사실 77년 고교 1학년 때부터 전국선수권에서 국가대표 홍진호(수경사)를 잡은 여세를 몰아 78년 세계선수권과(베오그라드) 79년 월드컵(뉴욕) 대회에 당당히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특히 79년 2월에는 제2회 인도네시아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슈퍼 루키였다.

 

김광섭은 선발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김지원(수경사), 오인석(한국체대), 박대천(영등포체) 등 특급복서들을 제압한 국내플라이급 1인자였지만 79년 세계청소년 대회에서는 8강에서 불가리아의 피터 레소프에게 판정패 탈락하고 말았다.

 

레소프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복서로 당시 허영모를 제치고 세계랭킹 2위에 자리한 세계적인 복서였다. 크게 상심한 김광섭은 80년 5월 전격적으로 프로에 데뷔했지만 주문균에게 KO패 당하는 등 심한 부침을 겪다가 9전7승(3KO승)2패를 남기고 86년 복싱을 접고 만다. 양인자 선생의 노랫말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 같은 짧은 복싱사였다.

 

한편, 박기철은 밴텀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정부수립 후 복싱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위를 선양하였고, 당시 42연승을 거둔 조프레이저의 아들인 마비스 프레이져가 헤비급에서 우승하며 주목을 받았던 인상 깊은 대회로 기억한다.  

 

김평국은 78년부터 오랫동안 경남대표로 전국체전과 대통령배에 출전하면서 박기철, 권채오, 성두호, 이용장, 장인수, 정희조, 유승기, 장정구 등 특급복서들과 승패를 주고받으면서 좌절하지 않는 승부사의 근성을 보여준 복서였다.

 

79년 12월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문성길을 꺾었던 김상수(대구공고)를 회심의 어퍼컷으로 3회KO로 잡으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김평국은,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플라이급에서 오인석, 김지원, 유승기와 함께 최종 선발전에 전격적으로 발탁되면서 세계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랜다. 그의 시련과 좌절은 억센 풍랑만이 강한 선장을 만들 듯 그를 도약 시키는 구름판 역할을 했던 것이다. 

 

▲ 김진권님과 임창용 관장 (사진=조영섭 기자) 

임창용은 모스크바올림픽 선발전에서 한 체급 올려 밴텀급으로 출전, 75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한창덕(53년, 서울)에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분패한다. 

 

80년 동아대에 진학한 임창용은 4월 김명복배 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자 박기철(한국체대)과 최우수복서 후보 물망에 오를 정도로 한수 위의 빼어난 기량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이듬해 동아대에서 펼쳐진 선발전 자체 평가전에서도 1년 후배인 김용호를 잡을 정도로 하이테크한 복싱 스킬을 보여줬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멘탈이 붕괴됨과 동시에 동력엔진이 꺼지면서 별다른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다. 짧은 순간 애벌레 딱지를 떼고 나비로 변신에 성공했지만 호랑나비처럼 훨훨 날지 못하고 날개를 접은 것이다. 

 

송광호, 김명환, 홍동식 등 임창용과 비슷한 수준의 동아대 소속 복서들이 태극마크를 달면서 전국선수권대회에서 무려 8차례 종합우승을 차지한 명문대학임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유달산 기슭아래 허름한 월3만 원짜리 자취방에서 간장에 밥을 비벼먹으며 유달산 정상을 오르내리며 새우잠을 자면서도 고래 꿈을 꿨던 문성길의 우공이산(愚公移山)정신은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임창용은 현역은퇴 후 경북심판장을 역임하면서 공명정대한 포청천으로 이름을 날린다. 당시 중앙에는 난세의 영웅 황철순이라는 인물이 82년 등장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심판진을 쥐락펴락 하던 시절이 있었다. 

 

리라공고와 서울시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그는 고향 고성을 발판으로 한 부산·경남 인맥과 남산공전과 동국대를 거쳐 한국화약과 태릉선수촌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심판진들을 특유의 친화력으로 감싸며 마치 ‘하나회’처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은 인맥들이 주변에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하지만 임창용은 포커페이스(Pokerface)였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양심적으로 판결을 내린 최고의 포청천으로 나는 그를 기억한다. 임창용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목적지 제천에 도착했다. 감악산 기슭에 있는 산내들이란 카페로, 임창용의 지인인 김진권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다. 

 

▲ (왼쪽부터) 김희갑 선생, 임창용 관장, 양인자 선생 (사진=조영섭 기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동원 씨가 지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서정적인 멜로디로 촉촉히 가슴을 울리던 그의 노래가사가 절로 나온다.  

 

잠시 후 그분의 이름을 빼고는 대중음악사를 말할 수 없는 작곡가이자 52년간  △그겨울의 찻집 △바람이 전하는 말 △킬리만자로의 표범 △타타타 △알고싶어요 △향수 등 주옥같은 3천여 곡을 작곡한 가요계의 거장 김희갑 선생과 아내 양인자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주보며 인사를 나눴다. 평양이 고향인 김희갑 선생에게 ‘북한에서 원산은 △황을수 △강준호 △김정연 △이용식 등 명망 있는 복서들이 배출된 복싱의 고장이지만 선생이 태어난 평양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탄생지이기에 음악의 도시라 말할수 있겠다’는 나의 말에 “무슨 말씀입니까? 평양박치기가 더 유명한 도시입니다”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1936년생 김희갑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신 최희준과 위키 리(이한필)와 동갑이지만 건강해 보였고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인상이었다. 노력파로 소문난 조용필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조용필의 목소리는 천부적으로 타고났어요. 노력만으론 될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양인자 선생이 “60퍼센트 까지는 노력으로 따라 잡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듭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두 분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전형이었다. 

 

재능만으론 스타는 될 수 있지만 수퍼스타는 타고나야 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율곡 선생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에도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다고 했지 않은가. 혈통 없는 잡종견(雜種犬)이 아무리 특수훈련을 해도 진돗개가 될수 없다는 나의 지론과 일치하기도 한다. 

 

에디슨은 천재는 1프로의 영감과 99프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누구나 99프로의 노력은 할 수 있지만 1프로 영감은 천재만이 떠올릴 수 있다는 생각을 역설적으로 해본다. 다가오는 천고마비의 계절 어제도 오늘도 한국복싱의 부활을 소망해본다.

 

조영섭

 

문화저널21 복싱전문기자

 

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

현)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전) 82년 로마월드컵 대표선발전 플라이급 우승

베냐민 19/08/24 [10:38] 수정 삭제  
  멋진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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