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여보 검찰총장, 각하가 울고 계세요”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19/08/27 [16:03]

[그날] “여보 검찰총장, 각하가 울고 계세요”

최병국 기자 | 입력 : 2019/08/27 [16:03]

자식의 구속 앞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김영삼 대통령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월 한보철강 부도 사태로 정국이 격화되면서 혼란수습을 위해 소통령 역할을 했던 차남 김현철의 구속 불가피 상황임을 직감하여 갈팡질팡했다. 김현철을 압박해가는 수사의 정점시기인 5월 초순 당시 김용태 비서실장이 김기수 검찰총장에게 전화해 아들 김현철의 구속과 관련하여 “여보 검찰총장!... 각하가 울고 계세요.”라는 아버지로서의 회한의 심경을 전달하기도 했다. 전말을 살펴본다.

 

  • 불굴의 민주투사 강골정치인 김영삼
  • 자식 앞에서는 나약했던 아버지

 

1927년 12월 경남 거제군 장목면 대계리에서 출생한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은 손명순 여사와 결혼 후, 은철, 현철, 은숙, 혜숙 등 4자녀를 출생시켰다.

 

김영삼은 1954년 이기붕 부통령에 요청에 자유당에 입당해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경남거제에서 당선되어 의원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하면서 험난한 야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영삼의 정치역정은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의 역사 자체였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한 민주화 및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청산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 등을 통해 군정을 종식시키면서, 문민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자신이 걸어온 험난했던 정치적 가시밭길을 떠올리면서 자식들만은 정치인이 아닌 평범한 인생을 살 것을 희망했다. 장남 은철이 부친 김홍조 옹의 멸치잡이 어장을 물려받아 평범한 어민의 길을 걷고 있는데 만족했고, 차남 현철이 정치적 소질을 보이는 점을 우려해 지인들을 통해 정치인의 길을 걷지 말 것을 조언해 주도록 수차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철은 1987년 제13대 대선 때부터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특히,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 10개월 전부터 현철은 김영삼의 선거사조직인 나라사랑본부(일명 ‘나사본’) 등에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고, 선거기간(10월∼12월)에는 ‘나사본’을 실질적으로 총괄 관리하면서 아버지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선거결과는 아버지 김영삼의 대승이었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선 후부터 현철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특히,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 출범 후 ‘김현철에 의해 정부 요직의 주요 인사들이 발탁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소통령’이라는 언어가 은밀히 회자하기 시작했다. ‘김현철이 소통령이다’란 소문은 김영삼 정부 시절 내내 세간에 회자되면서, 그의 행보가 주목을 받아왔다.

 

이런 와중인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부도처리 되면서 경제적 대 충격파를 던졌다. IMF의 서막이 울린 것이다. 한보철강의 부도에 따라 불법 대출 및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국회의원, 장관, 은행장, 재벌 총수가 줄줄이 구속되기 했다. 이 과정에 김현철도 2월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면피용 수사였다.

 

이런 과정에 오랫동안 김영삼의 금고지기 역할을 했던 홍인길 전 총무수석이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라는 `깃털론`을 주장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바람에 그렇다면 몸통은 누구냐?”라고 하는 등,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의혹의 시선은 소통령 김현철에게 쏠려졌다.

 

여론 악화에 따라 3월 21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최병국 검사장에서 심재륜 검사장으로 교체되면서 김현철에 대한 본격적인 재수사가 시작됐다.

 

재수사 초기(3월 하순)의 어려운 터널을 지나 4월 중순께부터 김현철에 대한 각종 의혹에 대한 증거들이 하나씩 확보되면서 수사가 진전을 내기 시작했고, 이에 반하여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김현철 방어를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또한, 안기부 등을 통한 수사 정보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7년 4월 하순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한 권영해 안기부장은 “검찰이 대통령의 통치자금인 200억대의 돈다발까지 확보했다. 김현철의 구속은 불가피한 상황이다”라고 보고한다. 순간 김 대통령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고 한다.

 

김영삼은 차남 현철을 특히 아꼈고, 거의 현철에게 꼼짝 못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정치자금 파문을 일으킨 X파일에도 잘 나타나 있다(‘김현철 부부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너무 무례하여 깜짝 놀랐다... X파일 중). 이토록 총애하던 차남 김현철의 구속 불가피 상황을 예감한 김영삼은 이후(5월 초순)부터 거의 식음을 전폐하면서 불면의 나날들을 보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 현철 문제에 대해 멍하니 밖을 응시하거나 눈물까지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이런 모습이 안타까워 구속(5월 17일) 며칠 전 김용태 비서실장이 김기수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여보 검찰총장…! 각하가 울고 계세요”라면서 대통령의 처참한 심경을 전했다. 이에 검찰총장은 ‘묵묵부답했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5월 17일 김현철은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어 갇혔다. 다음날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TV에 비친 사과를 하는 김 대통령의 모습은 완전히 넋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자식 때문에 혼을 잃어버린 것이다.

 

현철 구속 직후 마산에 거주하는 부친 김홍조 옹이 전화로 “영샘아, 니 와이러노, 정신이 있나, 없다”는 식으로 퍼붓기도 했다. 김홍조 옹은 김영삼 집권 이후 하나회 척결 등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폭발하자 “영샘아 자알한다. 계속해라”면서 신바람 전화를 했으나, 손자 현철이 구속되자 “미쳤다”는 식의 전화를 하여 아들인 대통령을 퍼부었다. 서민들의 일상사와 다를 바는 없다.

 

현철 구속으로 혼쭐이 빠진 김영삼은 8월 4일 최상엽 법무부 장관을, 6일에는 김기수 검찰총장을 각각 교체하고 심기일전하려고 노력했으나, 구속의 충격파가 너무 커 비실정국을 운영하다, 11월 하순 IMF를 초래하여 국민이 비난 속에 식물 정권을 이끌어 가다 영원한 정적 김대중에게 정권을 넘겨준 후, 1998년 2월 24일 쓸쓸히 퇴임했다. 현철로 인한 불명예 퇴임의 상황이었다.

 

  • 생의 종점까지 자식(현철)사랑으로 일관한 민주투사 김영삼

 

김영삼은 퇴임 후 남은 삶을 오로지 차남 현철에 대한 사랑과 국회의원 만들기로 일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철을 사면복권 시키지 않자 면전에서 “독재자 김대중”이라면서 거친 비난을 퍼부었고, 이명박 대통령이 아들에게 신경 쓰지 않자 “명백이 이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라면서 성토했다. 박근혜 후보가 현철의 거제 출마를 반대해 공천에 배제되자 “박근혜는 용이 아니고 칠푼이다”고 비난해 한동안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이렇게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 현철의 국회 입성을 위해 퇴임 후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현직대통령을 비난해가면서까지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5년 11월 22일 영면했다. 그의 일생은 민주화 투쟁과 현철 사랑으로 일관됐다.

 

혈육으로 인해 어찌할 수 없는 정치파동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의 자식 챙기기 파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천륜 앞에 눈이 멀어져 판단력이 흐려져 파동을 일으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며, 운명에 따른 시련 역시 피할 수 없는 업보로 보인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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