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제42회 대통령배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충북영동의 유원대학교 복싱부에 소속된 미들급의 신유섭과 수퍼 헤비급의 이병인 두 선수가 체급별 우승을 차지해 종합우승을 차지하면서 복싱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전용체육관도 없이 강동구에 있는 사설 캡틴체육관에서 일반 회원처럼 관비를 내고 순수한 아마추어정신으로 훈련하면서 일궈낸 금자탑이라 더욱 더 주목을 받은 것이다.
특히 배재중학교를 다닐 때 전도유망한 럭비선수였던 이병인은 졸업말미에 복싱으로 전환, 그의 성장가능성을 눈여겨 본 필자가 당시 서울체고 복싱 강사였던 최종하 선생에게 부탁해 가교역할을 하며 입학을 시켰던 복서라 관심 있게 지켜봤던 복서였다
185cm의 훤칠한 키에 90kg 의 당당한 체격의 이병인은 2013년 서울체고에 입학한 후 가끔씩 필자의 체육관에서 프로선수들과 스파링을 몇 차례 치렀는데 강철체력과 함께 칼날처럼 예리한 카운터펀치를 작렬시키는 그를 지켜본 문성길 챔프가 “저 녀석 물건 되겠는데”라는 멘트와 함께 이병인과 같은 사우스포이자 헤비급복서였던 “86서울아시안게임 헤비급 금메달리스트 김유현(경희대)의 소프트웨어와 88서울올림픽 헤비급 은메달리스트인 백현만(경희대)의 하드웨어를 혼합한 듯한 복서”라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졸업반인 2015년, 연맹회장배 준결승에서 경남체고 복서에게 분패하며 동에달에 머문 이병인은 부상으로 학생선수권에 불참, 대회2연패에 실패하고 다가오는 전국체전을 목표로 총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서울복싱협회가 내분과 갈등으로 관리단체로 지정되면서 서울시체육회는 전국체전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대신 6월에 벌어지는 회장배 대회성적으로 선발 한다는 공문을 발송한다.
중요한 것은 회장배 대회는 우승과 준우승자는 출전할 수 없는 B급대회로 속칭 ‘삐꾸’대회라고 복싱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형적인 마이너 대회다. 일본어로 B급을 ‘비큐우’라 부르는데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이 말이 ‘삐꾸’로 변형됐고 우승 준우승자가 떨어져나간 대회를 그렇게 호칭한 것이다.
당연히 메이져 전국대회 타이틀을 보유한 이병인은 마이너 리거인 B급 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상실했기에 자동출전은 당연하게 여겼다. 더우기 22전 19승 3패 11KO승을 기록한 그는 이미 국가대표 상비군에 3차례나 선발된 검증된 복서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병인은 전국체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B급 대회 2등한 다른 선수가 출전을 한 것이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선발전에서 그는 희생양이 된 것이다 선발전의 생명은 공정성이다. 선발의 기준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견지해야 올바른 선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공정성을 훼손하면 선발전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보이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땀 흘려 금메달을 건지기 위해 헌신하는 학원스포츠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엉터리 선발전은 사라져야 한다. 바로 복싱몰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슴시린 사연으로 복싱에 염증을 느끼고 복싱을 접은 복서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불공정한 선발전 시리즈 중에 유독 잊히지 않는 경기가 떠오른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 밴텀급 선발전에서 상대편 서정수(홍익대)를 주저앉히고 자신의 소속팀 선수인 변정일(한국화약)이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복싱계 마키아벨리 황철순을 수년전 만나 장시간 대화하며 진위를 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필자에게 당시 “올림픽은 정수(서정수)가 나가는 게 원칙이었다”고 회고하면서 사전에 작업(?)을 한 공정하지 못한 선발전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필자는 궤변과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은 선배 황철순을 솔직 담백한 사나이라 생각한다. 한때 복싱계를 쥐락펴락했던 그는 “복싱경기에서 비굴함은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세계적인 화가 르느와르는 관절염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왜 그림을 그리냐는 주변의 걱정에 “아픔은 순간이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란 말에 대비되는 명언이었다.
한편, 올림픽에 출전한 변정일은 2회전에서 불가리아의 ‘흐리스 토브’에게 패하고 탈락했는데, ‘흐리스 토브’는 2년전 리노 세계선수권에서 문성길과 맞대결해 일방적으로 난타당한 끝에 2회 RSC로 패한 바로 그 복서였다.
이병인은 결국 원하는 한국체대 진학이 좌절되자 방향을 전환해 2016년 충북 영동의 유원대학 경찰소방 행적학부에 진학한다. 대전과 김천사이에 위치한 충북 영동은 인구5만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충북 영동은 거문고의 왕산악과 가야금의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리는 조선 세종때 난계 박연선생이 태어난 고장이다.
유원대 우태식 경찰 소방학부 지도교수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이병인이 졸업하는 유원대 경찰소방학부는 △경찰행정 △소방행정 △교정복지 △국방전공으로 구성됐으며, 특히 경찰행정은 국내질서 파수꾼으로 날로 인기가 급부상 하고 있으며 졸업 후 경찰관, 교도관, 장교, 국정원, 수사기관 등 진로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학과이자 취업률이 전국 상위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원대의 복싱부 정식창단은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유원대에서 우태식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캠퍼스생활을 한 복서 이병인은 스포츠는 촌각을 다투는 것이지만 삶은 장거리 장시간의 승부라는 것을 자각하고 훗날 자신의 삶에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2017년 대통령배대회 우승에 이어 회장배 대회까지 석권하면서 2관왕을 차지한 이병인은 영주시청 백낙춘 감독의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심사숙고 끝에 복싱을 접는 결단을 내리고 내년 4월에 해군장교시험 예약을 마쳤다. 새롭게 펼쳐진 인생 2회전에서 충북 영동출신의 프로야구 홈런왕 장종훈(빙그레)처럼 시원한 홈런을 날려주길 바란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인생은 B와D 사이의 C”라고 갈파했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선택(choice)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한자숙어에도 인물을 고르는데 4가지 덕목에서도 신언서판 (身言書判)이라 하여 4번째에 선택과 동의어인 판단력이 들어간다.
필자도 1998년부터 2001년까지 4년간 서울체고에 재직하면서 국나남·김정섭·신상민·서영민·신동천·서윤복·황이태 등 7명의 복서를 복싱 사관학교인 한국체대에 진학시켰지만 새천년 제50회 학생선수권 헤비급 우승을 차지한 이용암은 돌연 한국체대를 외면하고 중국 북경대로 방향을 틀었다.
중요한 것은 이용암은 대학졸업후 귀국해서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여타 서울체고 출신 동료 선후배보다 훨신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추해 보면 그가 진로를 변경한 것은 신의한수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울체고 재학시절 후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대표이자 킹스컵(2002년) 금메달리스트인 홍무원(당시 원주 대성고)과 2008년 세계선수권자인 이옥성(당시 경남체고)을 각각 두 차례씩 꺽었던 국나남은 2000년 한국체대 진학 후 복싱을 접고 자퇴 후 현재는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국가대표 최근식( 부천공고ㅡ용인대)을 RSC로 잡은 신상민은 입학도 하기 전에 복싱을 접었다. 체고의 지겨운 기숙사 생활이 체대에서도 같은 연장선에서 반복되다보니 권태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복싱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올림픽 금메달 혹은 세계챔피언 탄생은 대나무처럼 길게 펼쳐진 인생의 여러 마디의 중의 한마디에서 성공한 것이지 인생전체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한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될 수 없듯이 한 번의 성공이 영원한 성공이 아닌 것이다.
조영섭 문화저널21 복싱전문기자
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 현)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전) 82년 로마월드컵 대표선발전 플라이급 우승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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