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0. 16. 부마항쟁 40주년…김영삼총재 제명 등, 현대사의 숨가쁜 순간들

1979. 5. 30. 김영삼 총재선출로 민주회복을 향한 역사의 길 열려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19/10/16 [08:35]

[그날] 10. 16. 부마항쟁 40주년…김영삼총재 제명 등, 현대사의 숨가쁜 순간들

1979. 5. 30. 김영삼 총재선출로 민주회복을 향한 역사의 길 열려

최병국 기자 | 입력 : 2019/10/16 [08:35]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 선출의 파란은 유신독재의 종막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후 YH여공 김경숙 양의 죽음, NYT 기자회견, 김 총재 직무정지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 선별수리론은 부마민주항쟁을 불러와 10. 26사태를 야기 시켰다. 김영삼 총재선출부터 10. 16. 부마항쟁 및 10. 26. 사태에 이르기까지의 파란과 격동의 현대사를 살펴본다.

 

1979. 5. 30. 김영삼 총재선출로 민주회복을 향한 역사의 길 열려

 

박정희 대통령 철권시대인 1979. 5. 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김대중이 연합하여 성공시킨 김영삼 총재 선출은 민주회복을 향한 역사의 길을 개척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의 가열찬 민주투쟁 결과로 10. 16.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10. 26. 사태까지 발생했다. 격동과 파란의 세월이었다.

 

▲ 경남 거제의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에 전시된 김영삼 대통령 밀랍인형. (사진제공=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특히, 전당대회 전날(29일) 을지로4가 아서원에서 개최된 김영삼-김대중이 연합한  ‘민권의 밤’은 민주회복을 향한 역사적 이정표였다. ‘민권의 밤’에서 분출된 열화 같은 민중들의 함성으로 김영삼 후보가 역전승했다. 김 총재는 당선 수락연설에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옵니다. 민주회복을 위하여 이 한 몸 던지겠습니다.”라고  사자후를 토해냈다. 민주회복을 향한 민주대장정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다.

 

이후 처음 부딪친 난관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공 김경숙 양의 죽음이었다.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1979년 8월 9일 새벽 신민당사에 187명의 YH무역 노동자이 결집하여 농성을 벌였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농성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하였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이에 격양된 박정희 정부는 강제 진압했다.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로 진입하여 총재실 등을 파손하고, 김영삼 총재, 국회의원, 기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던 4층에도 경찰이 진입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와중에 YH노동자 김경숙의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면서 추락, 사망했다. 김경숙의 죽음은 박정희정권 몰락의 도화선이 됐다.

 

총재직무정치가처분, 의원직 제명, 선별수리론이 불러온 부마민중항쟁

 

1979년 8월 11일 김경숙 양의 죽음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의 제거를 결심한다. 이에 조일환, 유기준 등 신민당 원외지구당 3명을 사주(?)하여 8월13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치 가처분 신청을 내게 했다. 서울민사지방법원 합의 16부는 9월 7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등에 직무집행정지가처분 결정을 내리고, 다음날 오전 법원 집달관을 통해 결정문을 전달했다. 법원 가처분결정으로 정당대표의 직무가 정지된 것이다.

 

이에 김영삼 총재는 9월 15일 NYT 특파원과 기자회견 하면서 박정희 정부를 맹공했다. 대폭발이었다. 회견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영삼 총재 제거(살해?)를 지시한 것이 김재규 재판과정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9월 15일 NYT 특파원과 기자회견에서 김 총재는 ‘카터 미 대통령 방한 말라’ ‘김일성 면담용의 및 미국의 한국 독재정권 지지철회 요청’등으로 알려진 김 총재의 외신 기자회견에 대해 여당(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에 대해 사대주의적 언동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면서, 그냥 둘 수 없다고 공언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는 10월4일 김영삼 총재 국회의원 제명 및 의원직 박탈로 이어졌다. 김영삼 총재는 제명 및 의원직 박탈 직 후, 의원회관에서 “절두산을 바라보는 이 의사당에서 나의 목을 자른 공화당 정권의 폭거는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면서, “나는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 직후 김영삼 총재는 가택연금 당했다.

 

▲ 경남 거제의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에 전시된 부마항쟁 축소모형 (사진제공=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파장은 심대했다. 제명에 대한 항의로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과 통일당 의원 3명의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에 공화, 유정회는 ‘사퇴서 선별수리론’을 흘려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폭풍의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되었고, 16일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과 시민들까지 가담하여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16일과 17일 부산 전역에서 김영삼에 대한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8일과 19일 경남 마산 및 창원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부마민중항쟁이 10. 26 사태를 불러와 유신독재시대를 종식시키다

 

1979년 10월 15일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 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해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로 시작되는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민주선언문’ 배포로 시작된 민주항쟁이 마산, 창원까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15일 ‘민주선언문’ 배포 및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 주도로 시작된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발전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경찰서 등을 점령하려 했다. 거대 민중항쟁의 신호탄을 울린 것이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을 부산으로 보내 우선 현지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상황심각 보고에 따라 박 대통령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을 선포했고, 10월 20일 마산, 창원지역 등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비상계엄령 선포 및 위수령 발동으로 18일 부산에서 1,058명을 연행하여,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마산 및 창원 일원에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러한 강경책으로 시위를 일단 제압되었으나, 부마지역에서 또 다시 대규모 군중시위가 예고되는 삼엄한 상황이었다.

 

이에 차지철 등 강경세력 들은 김영삼을 우선 체포하고 황낙주, 김덕용을 비롯한 상도동계 국회의원 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이 과정에 캄보디아 300만 사살 등을 빗대 일부 시민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발사명령까지 고심한 사실이 김재규 재판과정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및 또 다른 대규모 시위 예고에 따른 권력내부의 갈등으로 1979년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의해  대통령 서거로 18년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1979년 10월의 부마민주항쟁은 민주광명의 새로운 대한민국 발원지다

 

1979년 5월 30일 김영삼 총재 선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의원직 제명과 ‘사퇴서 선별수리론’에 분기하여,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란 ‘민주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1979년 10월의 부마민주항쟁은 질곡의 유신독재를 타파한 역사의 빛으로 영원히 기념해야 할 민주광명이다.

 

부마민주항쟁 발생 및 10. 26 사태로 인한 유신체제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 중정부장이었다. 김 부장은 신민당 전당대회 전날 연금 중이던 김대중을 하루 풀어주어 김영삼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극적인 역전승으로 총재에 당선된 김영삼은 취임직후부터 민주회복, 양심수 석방, 개헌특위 설치, 사법권 보장 등을 부르짖으면 박정희 정권을 극렬히 규탄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영삼의 제거(암살?)를 지시했다. 박 대통령의 김 총재 제거지시에 같은 김녕 김씨로서 평소 김영삼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김재규는 번민했고, 이러던 중 부마민중항쟁이 발생했다.

 

부마민중항쟁을 현지 실사한 김 부장은 ‘좌익폭동이 아니고, 서민들까지 가세한 시위였으며, 조만간 더 큰 시위가 우려 된다’고 사실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김 부장의 무능력을 질책했고, ‘다시 시위가 일어나면 직접 발사명령을 내리겠다.’는 강경진압을 암시했다. 이는 최후 진술 등을 통해 알려졌다.

 

어쨌든 1979년 10월 15일에서 20일까지의 부마민중항쟁은 계엄령, 위수령 등으로 제압했지만, 또 다른 대규모 시위는 불가피했고, 이런 과정에 대규모 시민학살 및 김영삼 총재 피살까지 예견되어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부마사태 수습 및 향후 도래할 대규모 시위와 김영삼 총재 대응책을 놓고 차지철 주도의 강경책을 박정희 대통령이 편들면서, 도리어 무능과 소극적 자세 등을 질책하자 박대통령을 행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결국 10월 부마민중항쟁이 김재규로 하여금 박 대통령을 피살케 만들었고, 민주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렇듯 질곡의 유신체재를 종식한 역사의 변곡점에는 부마민중항쟁의 함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부마민중항쟁은 영원히 기념해야할 민주회복의 광명이자, 민주·정의 만개하는 새로운 대한한국의 발원지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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