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0. 26. 사태’의 역사성과 의미…재평가 될 것인가

김영삼 총재선출로 시작돼 부마민중항쟁의 결과가 빚어낸 역사의 필연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19/10/16 [16:50]

[그날] ‘10. 26. 사태’의 역사성과 의미…재평가 될 것인가

김영삼 총재선출로 시작돼 부마민중항쟁의 결과가 빚어낸 역사의 필연

최병국 기자 | 입력 : 2019/10/16 [16:50]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여 18년 (유신)철권통치시대를 마감했다. 그러나 전두환 보안사령관(합수본부장)에 의해 당일 김재규 및 박흥주 등,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어 군법회의를 거친 후, 1980년 3월에서 5월 전원 총살 내지 교수형이 집행됐다. 10. 26. 事態의 역사성과 의미 및 향후 재평가 가능성 등을 살펴본다.

 

김영삼 총재선출로 시작돼 부마민중항쟁의 결과가 빚어낸 역사의 필연

 

1979년 10. 26. 사태는 그해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 당선으로부터 잉태되어가고 있었다. 이후 민주회복투쟁이 격화되면서, YH사건 김경숙 죽음, 김영삼총재 직무집행가처분, 의원직 제명, 야당의원사퇴서 ‘선별수리론’으로 여론이 악화되어 10월 15일부터 부산, 마산, 창원 등지에서 학생,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하여 계엄령 선포와 위수령 발동으로, 일단 20일 1차 진압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마사태 발생 후 계엄령 선포와 위수령 발동으로 시위대를 검거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함으로, 시위발생 5일째인 20일 형식적으로 시위는 진압됐으나, 김영삼 총재 제거(암살?) 계획 및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예고됐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진압 대책 및 방법 등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차지철 경호실장과 온건파인 김재규 부장간의 갈등은 높아만 갔다. 특히, 차지철 경호실장은 다시 시위 발생 시 무차별 살상진압을 주장했고, 박 대통령 또한 이에 동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 수습을 주장한 김재규 정보부장의 총탄에 현직 대통령이 피살된 것이다. 이는 (추가)부마민중항쟁 진압 방법 등을 둘러싼 정치권력 내분이 빚어낸 결과로서, 역사 흐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직후 대통령 암살을 주도하고, 가담한 김재규, 박흥주,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해 전원 체포되어 군법회의를 거친 후, 1980. 3. 16. 현역군인 박흥주는 총살형, 같은 해 5. 24. 김재규 외 4인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교수형)됐다. 이후 열성지지자들은 매년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또한 안동일 변호사를 중심으로 ‘6인합동추모제’가 매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리고 있다.

 

김영삼 체포 구속 등, 유혈참극 임박상황에서 10. 26 사태 발생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 현직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태는 세계 정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자 정변이다. 주동자 김재규 부장 이하 관련자 모두 체포되어 사형됐다. 정변발생 40년, 사형집행 39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재규 등 관련자들의 신원회복이 줄기차게 진행되고 있다.

 

과연 10. 26사태가 남긴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고, 향후 어떻게 재평가되면서,  공론화 과정 등을 거쳐 신원이 회복될 수 있을지 관심사항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해선, 우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재평가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하여 1979년 중정부장의 총탄에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아래 나라를 가난에서 구해낸 ‘근대화의 아버지’란 긍정적 평가와, ‘인권유린 및 긴급조치’로 일관하면서 종신집권을 꿈꾼 ‘절대적 독재자’란 부정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는 최소 한 세대 이상은 지속될 것이다.

 

솔직히 현재까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功過(공과)에 대해 국민 과반수이상은 경제개발에 대한 功(공)에 70%, 유신독재에 대한 過(과)에 30%정도 평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들 뇌리 속에 ‘박정희’란 인물이 그만큼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는 향후에도 10. 26재평가 및 김재규 등 관련자들의 신원회복(伸寃回復)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조선 세조 시절 참화를 당한 死六臣(사육신)은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伸寃回復이 됐다.

 

그러나 그 시대를 진하게 호흡한 기자의 역사관점에서 보면, 김재규의 행동이 의롭고 정당하냐의 차원을 넘어, 철권 통치자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꿈꾼 사람이다. 오죽하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하였겠는가? 이는 숨을 거두기전까지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인 것이다. 또한 당시 긴급조치 9호를 4년 이상 발효시켜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용공조작 등으로 학살하거나 탄압했기 때문에 물러 나려해도 물러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상황은 김영삼 총재에 대한 테러 및 내란선동 체포구속은 명백했고, 이로 인한 부산 경남의 대규모 봉기 또한 불문가지였다. 그야말로 대규모 유혈참극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0. 26사태가 발생했다.

 

10. 26 사태는 역사 속에 재평가 되면서, 6인의 伸寃은 回復돼야

 

어쨌든 중앙정보부장이 현직 대통령을 시해한 일은 이유 불문하고 인륜에 어긋나고, 혁명이란 미명하에 집권을 위해 총성을 울렸다면 더욱 지지받을 수 없다. 이런 연유로 김재규 부장 등 10. 26사태 실행자들을 침략의 원흉 이토 총독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김재규 부장의 총성은 결과적으로 철권통치를 종식시키는 ‘의로운 총성’이 되었다. 그날의 총성이 없었더라면 당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날의 총성이 유신통치를 종식시키면서 민주한국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의 필연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총성의 목적과 상황 등을 배제한 결과론적 평가이자, 분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10. 26사태는 당시의 상황 및 변모하는 시대정신에 입각하여 학술심포지엄 등을 통해 우선 입체적으로 재조명, 재평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행위의 시대성 및 불가피성에 대한 공론화를 시도해야 한다. 재평가 등을 위한 공론화시도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 올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값비싼 사회적 홍역을 치를 수도 있다. 그러나 10. 26사태는 40년 전 발생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영원히 묻어만 둘 수만은 없는 과거사 재평가의 한 영역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담담하고 냉철하게 분석, 평가하면서, ‘총성의 의미’ 등을 재평가, 재해석하여 ‘10. 26사태’의 역사성과 의미 등을 재확립하려는 지혜와 열정이 필요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를 향한 경제발전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마민중항쟁 발생 등, 당시 상황에 비춰, 만약 10. 26.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우선 연일 불거질 시위대를 강경진압하면서, 상황에 따라 발포명령도 했을 것이다. 더하여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화 상징들을 테러 및 구속조치 등으로 폭풍전야의 상황을 연출했을 것이다. 결국  몰락의 제국으로 떠내려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비극적 상황이 10. 26총성으로 방어된 것이다. 이런 거시적 관점에서 10.26 사태의 역사성과 의미 등을 재평가하면서 김재규 등 6인들의 伸寃回復을 논의할 시점이다. 이는 행위를 정당성을 초월한 역사성 차원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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