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⑤

[제1기] 전기통신의 뿌리(1870~1896년) 조선 한성에서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의 전신선 연결

이세훈 | 기사입력 2020/04/01 [08:37]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⑤

[제1기] 전기통신의 뿌리(1870~1896년) 조선 한성에서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의 전신선 연결

이세훈 | 입력 : 2020/04/01 [08:37]

[제1기] 전기통신의 뿌리(1870~1896년) 조선 한성에서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의 전신선 연결

 

청나라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자국의 전신선과 연결시킬 목적으로 1885년 서로전신선(한성-의주)이 청나라 기술자에 의해 건설되고 운용되었다. 

 

또한 일본은 청나라와 대결 구조 속에서 좁아져 가는 입지를 높이는 한편 1884년에 완성한 부산-일본을 잇는 해저전선에 연결할 목적으로 1888년 남로전신선(한성-부산)을 건설했다. 또 남로전신선 가설의 기술적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가 독자적인 의지로 1991년 북로전신선(한성-원산)을 가설함으로써 전신망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였다. 

 

서로(인천-한성-의주)전신선 첫 개통 (의주전선 합동의 체결) 

 

우리나라에서 전기통신이 널리 사용하게된 것은 1885년 인천을 기점으로 한성을 거쳐 평안도 의주에 이르는 경인·경의전신선 이른바 서로전신선의 가설에서 비롯하였다. 

 

이보다 1년 앞선 1884년 2월 부산포에 일본전신국이 설치되어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전신이 개통되었다. 이는 일본이 장차 조선에서의 전신사업권을 독점하여 그들의 정치·경제적 진출의 도구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한 개화파와 청나라를 등에 업은 수구파간에 충돌한 정치적 분쟁인 갑신정변(1884년)을 겪는 동안에 청나라는 조선의 정치·외교·군사·경제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지배를 위해서는 전신시설의 가설이 무엇보다도 먼저 서둘러야 하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의 조선 전신진출에도 자극되어 청나라는 조선에 전신시설을 가설하고 이를 자국의 전선에 연결시킬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와 일본은 본국으로부터 조선의 수도 한성에 이르는 전선 가설을 꾀하였다. 청나라가 먼저 1885년 6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이른바 ‘의주전선합동’이 맺어 지게 되었다. 

 

▲ (좌)조선시대 서로/남로/북로전신선 (문화저널DB) (우)1885년 한성-인천간 전신이 개통되었을 때 사용한 모르스 인자 전신기 (kt사료)

 

경인 전신선 

 

청나라는 경인전신선을 신설하기 위하여 기술자 등 150여명과 시설 자재 등을 천진에서 영청호에 싣고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조선 측에서도 전신주를 마련하고 이를 지키고 맡아 처리하는 사람을 배치하는 등 조약에 따라 처리해 나갔다. 인천에서 부평을 거쳐 양화진 즉 지금의 양화대교 약간 북쪽의 지점 사이를 수저선으로 연결하여 1885년 8월 19일 준공, 8월 20일 한성전보총국 개국일에 정식 개통되었다. 

 

당시 경인간의 통로는 시흥(영등포)을 거쳐 서강을 건너는 길과 양화진 길을 택하였다. 이 코스는 오늘날의 경인고속도로의 코스와 거의 같다. 한성전보총국은 광화문 부근 사역원 자리였고 인천분국은 인천 관동에 있었다. 

 

경의 전신선 

 

1885년 10월 13일 서대문(돈의문)에서 의주까지 전신주는 6,248주의 총 1,053리의 가설공사를 완공하였다. 이 때 가설된 경인·경의 간 전선을 서로전신선이라고 부른다. 이 전신선은 인천에서 부평, 시흥, 한성, 양주, 고양. 파주, 장단, 개성, 평산, 서흥, 평양, 순안, 숙천, 박천, 정주, 곽산, 철산, 의주를 통과하였다. 공사의 진척과 함께 평양과 의주에 전보분국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한반도 서북부지방에 전신이 개통되고 청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과 전신에 의한 통신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남로(한성-부산)전신선 개통 

 

일본은 인천에서 의주까지 전선을 가설하여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 전신선로와 이어짐을 문제 삼았다. 조선과 일본이 맺은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동의가 없는 한 청나라와의 조약을 폐기하여 서로전신선의 가설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주장이 거듭 되풀이 되자 서로전신선을 인정하여 주는 대신 조선정부가 한성-부산 간 남로전신선 가설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남로전신선은 착공 준비에서부터 많은 우여곡절로 2년 이상이 지연된 1888년 6월말에 이르러서야 준공을 보게 되었다. 

 

북로(한성-원산)전신선 개통 

 

북로전신선의 가설에 대해 청나라는 서로전신선을 이용한 무역 물량이 북로전신선으로 옮겨져 사업상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은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을 구실로 반대하였다. 청나라는 원칙적으로 반대하여 약 2년간 끌다가 실현되지 못하였다. 양국 간에 서로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로 조약을 맺어 추진할 것을 종용하는 등 우여 곡절을 거쳐 1891년 2월 15일 원산전선조약(원산합동)이 체결되었다. 

 

함흥까지의 전선 가설은 가을로 미루고 우선 한성-원산간의 전신업무를 1891년 6월 25일부터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때 가설된 전신선로는 한성, 양주, 춘천, 금성을 거쳐 안변. 함경도 덕원에 이르는 것이었다. 

 

북로전신선이 조선의 주관 하에 완공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뜻 깊은 일이나, 원산-함흥 간 가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당시의 기록은 장마가 심하여 공사 진행에 어려움이 많아 잠시 가을까지 미룬다고 하였지만, 그 밖의 다른 이유 즉, 당시 조선 정부의 러시아 접근을 경계하던 청나라와 일본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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