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⑦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소

이세훈 | 기사입력 2020/04/07 [17:43]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⑦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소

이세훈 | 입력 : 2020/04/07 [17:43]

[제2기] 대한제국의 전기통신 (1897~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소

 

우리나라 무선통신은 월미도에 무선전신소가 세워지면서 시작됐다. 무선전신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해는 1910년이다. 1903년 월미도 등대가 최초로 점등된 시기에 무선전신이 등대 시설과 함께 가설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무선전신은 1910년 8월 15일에 착공하여 9월 5일에 광제호와 월미도 무선전신소 사이에 최초의 무선시설이 준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2년 3월 대한제국 정부는 인천 해관 내에 항로 표지를 맡아보는 등대국을 신설했다. 1902년 5월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도, 백암 등에 등대 건설을 시작하여 1903년 6월에 점등을 개시했다. 우리나라에 건설된 최초의 등대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등대를 중심으로 한 연안 각 항구에 무선설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1901년 12월 29일 일본에 무선국 허가를 해주었다는 ‘황성신문’ 기사가 있다. 1885년 영국군의 거문도 주둔 등으로 볼 때 거문도 무선국의 존재가 좀 더 앞선 시기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실제로 무선통신 시설이 언제 광제호에 시설 됐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일본 측 기록으로는 1910년 9월 5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여러 흔적이 일본 측 기록에도 나타난다. 광제호가 도입된 시기 전후에 무선설비도 동시에 설치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선설비가 도입된 시기는 광제호가 인도되던 1904년 12월경 일수도 있을 것이다. 

 

  • 월미도 무선전신소

우리나라의 무선통신은 월미도 해안국과 광제호 선박국간에 무선전신에서 출발했다. 비록 군사용도에 불과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소라는데 의미가 있다. 무선전신은 1910년 9월 조선정부가 항공표식순찰, 세관감시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다목적 감시선 광제호에 무선시설을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함선에 전보를 중계했으나 일반전보를 취급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러일전쟁을 계기로 우리영토 내에 일본군용으로 시설한 무선설비가 있었다고 하나 우리정부가 정식으로 설치한 곳으로는 이곳 월미도가 최초다. 

 

한일병탄으로 시작하지 못했던 월미도, 목포, 소청도, 항문도 무선시설은 1910년 9월부터 1911년 2월까지 일본에서 준공했다. 일본이 대륙 진출의 군사·경제적 근거지로 삼았던 중국의 대련항 항로와 연결하였다는 점들을 감안하여 보면 그 실체는 제국주의 침략의 수단이 되는 선박의 항해를 도모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활발해짐에 따라 경성, 목포, 제주, 청진, 원산, 나진 무선국 등이 건설됐다. 

 

일본은 모든 통신사업을 총독부의 관장 하에 두었다. 이는 통신사업을 총독부에서 경영한다는 대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선통신이 지니는 특수성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중통신과 군용 통신시설을 제외한 모든 무선시설은 체신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체신당국에서 규정한 설비와 통신종사자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1923년 인천무선전신국이 문을 연데 이어 1925년 경성무선전신국이 확장되면서 월미도 무선전신소는 그 업무를 경성무선전신국에 인계하고 폐지된다. 폐지 후에는 안테나와 건물만이 남아 있었으나 1932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만다. 해발 108m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이다.

 

  • 조선함선 양무호와 광제호

대한제국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제물포를 개항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오호 사건 등을 겪으면서 고종은 해군력 강화에 주력한다. 1893년 설립한 한국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효시인 조선해방수사학당(통제역학당)의 설립과 열강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군함을 도입했다. 그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함선인 양무호와 광제호를 도입한다. 

 

1881년 진수한 양무호는 일본 미쓰이 물산이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1903년 조선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해 대한제국 돈 110만원에 무리하게 구입한다. 이 석탄 운반선을 전투용 군함으로 개조했으나 군함으로써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등으로 실제 국방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양무호의 실패를 경험한 대한제국이 일본 가와자키 조선소에 의뢰하여 1904년에 건조한 광제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다. 1904년 12월 20일 대한제국에 인도된 광제호는 해안경비, 등대순시 및 세관감시 등에 이용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일본이 식민지를 준비하던 통감부의 관용선으로 운영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에는 군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연안세관 감시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광제호는 1904년 6월 15일 진수된 후 1904년 12월 20일 대한제국 정부에 인도되었다. 전장 220척, 너비 30척, 총톤수 1056톤의 군함으로 건조됐다. 정부는 광제호에 3인치포 3문을 장착해 해안경비, 등대순시, 세관감시 등 다목적 선박으로 사용했다. 무선시설이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이다. 이후 상선과 인천해원양성소의 실습선으로 각각 사용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해군 보급선으로 사용되던 광제호는 광복후 일본인의 본토로 철수하는데 이용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 소월미도 등대

소월미도 등대와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드나드는 선박이 크게 늘어났다. 일본은 조선정부에 바닷길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위한 등대와 경계표지 초표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02년 3월 20일 인천해관에 등대국을 신설하고, 1902년 5월 16일 등대건설 작업에 들어간다. 인천항 팔미도, 소월미도 등대 건설은 1903년 4월 끝나고 1903년 6월 1일 점등하게 된다. 

 

1905년 10월 러일전쟁후 일본은 우리나라 전 연안에 등대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해방 전까지의 등대시설은 32기, 등표 110기, 무선전신 9기 등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폐망한 일제는 광복직후 1945년 8월 27일 소월미도 등대를 폭파시킨다. 이후 이 자리엔 최첨단 등대라 할 수 있는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들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당시에 건립된 등대는 소월미도 등대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좌)우리나라 최초의 월미도 무선전신소 (우)월미도와 최초로 통신한 광제호 


이곳 인천항해상교통관제센터는 인천항에 입항·출항·이동하는 선박과 초단파(VHF 채널 14번,68번)와 조난·긴급 비상통신(VHF 채널 16, DSC 70번), 레이더 등 통신망을 운용하여 선박을 관재하고 있다. 대한민국 VTS는 지방해양경찰청 산하의 해상교통관제센터로서 전국에 18개소의 VTS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세훈 

KT 시니어 컨설턴트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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