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용 화백의 인생과 예술을 향한 여정(1)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0/06/05 [22:40]

박종용 화백의 인생과 예술을 향한 여정(1)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0/06/05 [22:40]

들어가며 

 

강원도 내설악 백공미술관장인 화운당(花雲堂) 박종용 화백은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보헤미안적 삶을 살아온 운명적 예술가다. 8살 때부터 서예가와 화가인 부산 송도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주말 고향(함안)으로 돌아와 사랑채에서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스케치를 하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 예술인생의 출발이었다. 60년 전의 일이다. 이후 12살 때 화투 그림 등을 그려 보여주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림신동’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당시 그림 화투를 주고 고구마 등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림신동’이란 칭찬에 고무된 박종용은 이때부터 솔거 등과 같은 역사에 남을 화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운명적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다. 그리고 생명예술을 향한 운명전환

 

그의 초·중·고교 시절은 고향 함안 및 인근 마산, 창원 등지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간 비교적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후 대 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누를 길이 없이 17세에 상경하여 학업을 병행하면서 고려민예사 전속화가로 고용되어 인사동 조계사 건너편 고려민예사 소속 화가 몇 사람과 같이 화실을 마련하여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조계사의 단청을 보고 불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삼각지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렸고, 충무로에서 만화와 극장 간판 등을 그렸다. 또한 시간이 날 때 마다 청계천 만물시장을 찾아다니면서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각종 그림과 골동품들을 관찰하면서 모든 분야의 그림들을 그려내는 등, 스스로를 혹독하게 단련시켜 나갔다. 박종용의 예술(미술)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를 가혹하게 단련시키면서 이렇게 형성되고 진화되어 간 것이다.

 

이런 과정에 박종용의 예술세계는 나날이 숙련되어갔고, 필명도 나름대로 알려지게 되어 풍곡(豊谷) 성재휴, 남농(南農) 허건, 내고(乃古)박생광,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 등 당대의 거장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 화운당(花雲堂) 박종용 화백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


박종용의 인생은 눈물과 파란으로 얼룩진 한편의 희·비극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8살 때 스케치를 시작했고, 12살 때 화투 등을 그려 ‘그림신동’이란 칭송을 받는 바람에 화가를 결심했고, 17살에 상경하여 본격 화가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교사였던 아버님이 그가 23살 때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형제들의 생계유지 등을 위해 청년 시절부터 눈물을 흘려가며 손발이 벗겨지도록 인사동, 삼각지 화실 등지에서 만화, 극장 간판, 초상화, 산수화, 노안도, 영묘화, 책가도·백동자도·호렵도·까치호랑이 등 각종 민화류, 산신도·독성도·변상도 등 각종 불화(탱화) 및 호랑이 그림들을 밤낮을 가로 질러 쉼 없이 그려댔다.

 

보헤미안적 삶을 살아온 박종용은 재현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형상화한 오브제들이 살아 쉼 쉬는 생명예술을 갈망하면서 이를 항상 고민했다. 

 

2005년의 강원도 내설악 백공미술관 건립은 박종용의 새로운 예술세계 탄생을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풍찬노숙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늪 속에서 핀 꽃처럼 구상 및 사물의 재현에 있어 경지에 오른 박종용은 그간 수많은 작품들이 언덕너머로 사라져 생명성을 상실해 가는 현상에 서글픔을 느끼면서, ‘잠깐의 꿈속 세상에 예술가로서 순명(順命)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설악의 아틀리에에서 영원을 갈구하는 ‘생명예술’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새로운 예술세계의 개척을 위해 설악의 아틀리에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마치 구도자와 같은 심정으로 설산의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혹독한 수행의 시간들을 보냈다.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형상화하기 위해 뜨거운 예술의 용광로에서 스스로를 던져 몸부림치면서 처절한 수행과 노동을 감내한 것이다.

 

박종용 화백의 추상표현주의의 새로운 예술세계는 10여년에 걸쳐 이러한 수행과 인고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완결되어 작년 1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속살을 드러내면서 뜨거운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영원의 작가, 생명의 작가를 향한 일대 변신과 새로운 예술의 정체성 확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종용 화백의 새로운 추상표현주의 예술은 세계현대미술의 메카인 미국 뉴욕까지 알려져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머지않아 세계적 진출이 예상된다. 만고풍상을 겪은 60년 화업의 박종용 화백의 인생과 예술(작품)의 변천사를 12회에 나눠 취재·연재한다.

 

박종용 예술의 뿌리, 만화·극장 간판을 그리면서 단련시키다(Ⅰ)

 

박종용 화백은 천래적인 예술가이다. 백발이 성성하게 휘날리는 범상치 않는 외모자체가 한눈에 예술가임을 직감케 한다. 운명의 계시에 따라 그는 파란만장한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생의 시련은 그를 더 야무지게 만들고 있으며, 예술가로의 기품과 정열이 넘쳐흐르게 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출발. 치열한 예술 혼을 불태워 대가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다

 

화운당 박종용 화백은 1953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해 8살 때부터 스케치를 시작했으며, 12살 때 화투를 그려 주민들로부터 예술신동이란 칭찬을 듣기도 했다. 이것이 예술가로 빠져 들어간 계기가 되었다. 일러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없다.

 

초·중·고교시절 박종용은 고향 함안과 인근, 마산, 창원 등지에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대 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누르지 못해 17세에 상경한다. 이후 고려민예사 전속작가로 취업하여 조계사 인근에 아틀리에를 마련한 후 학업을 병행하면서 만화, 극장 간판, 초상화, 산수화, 노안도, 영묘화, 책가도·백동자도·호렵도·까치호랑이 등 각종 민화류, 산신도·독성도·변상도 등, 각종 불화(탱화) 및 호랑이 그림들을 밤낮을 가로 질러 쉼 없이 그려댔다.

 

20살도 되지 않는 젊은 나이에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고려민예사 전속작가로 발탁되어 불철주야 갖가지 그림을 그렸고, 그의 그림들은 고려민예사 등을 통해 인기리에 판매되었기에 인사동 화랑가나 당시 대가들 사이에 그의 필명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즉, 무명이지만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시기에(60년대 후반〜70년대 후반) 내고(乃古) 박생광 화백이 박종용을 화실을 찾아와 “무릎 팍이 닳도록 그려라. 반드시 대성한다”라고 격려한 것을 비롯하여, 풍곡(豊谷) 성재휴, 남농(南農) 허건,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 등 당대의 거장들이 그의 화실이나 전시장을 찾아와 격려하거나 자신의 화실에 초대하여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특히, 남농(南農) 허건 화백은 박종용의 호랑이 그림에 소나무를 그려 주면서 ‘필력이 최고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은 거장들의 합작도 마무리를 박종용에게 맡긴 후, 등을 두드려주곤 하였다. 합작도의 마무리를 박종용 화백에게 맡긴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종용 화백을 특히 아낀 풍곡(豊谷) 성재휴 화백은 등산을 같이 다니면서 “참으로 대단한 필력이다. 앞으로 최고 경지에 이를 것 같다”고 격찬하면서 더욱 화업에 정진할 것을 수없이 당부하기도 했다.

 

특히 23살 때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어머니 및 형제자매들의 생계유지 등을 위해 손발이 벗겨지는 아픔을 참으면서 정말 눈물겨운 노력을 다하여 만화, 초상화, 극장 간판을 필두로 정물, 산수화, 영묘화, 불화 등 각양각색의 그림을 신들린 사람처럼 불철주야 그리고 또 그렸다. 이런 과정에 천부적 재능이 여지없이 발휘되어 모든 사물과 현상 등을 능수능란하게 표현됨으로서 당내의 거장들로부터 ‘최고의 필력이다’라는 찬사를 수없이 듣곤 했다. 

 

이렇듯 박종용 화백은 누구의 가름침도 없어 독학으로 모든 사물과 현상 등을 능수능란하게 표현해 낸 천래적 작가이자 운명적 예술가이다. 특히 70년대 중반 어렵게 결심하여 국선에 출품했으나 낙선을 했는데, 이후 덕수궁 미술관에서 입선작들을 관람하면서, 자신의 눈에는 기초조차 없는 보잘 것 작품들은 입·특선되고 자신의 작품은 낙선된 것에 충격 받아 ‘국전은 실력이 아니다’라고 판단하여, 이후부터 국전을 외면하고 고독한 재야작가의 길을 걸었다

 

60 수년 풍상의 성상 속에서 화운당 박종용 화백은 비바람 속에 강인하게 생존하는 야생화처럼 경계를 넘어 마침내 추상표현주의의 새로운 예술영역을 개척하는 등 광대무변(廣大無邊)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현재 예술에의 순교를 다짐하면서 미의 진실을 향해 새로운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향후 그의 예술은 새롭게 재조명 받을 것이고, 세계적 평가도 뒤따를 것이 예상된다. 세계를 향해 새로운 출항을 준비 중인 상황이다.

 

60년 광활한 박종용 예술인생의 체계 구축을 위해 1970년 작 만화부터 노안도·목단화, 누드화, 산수화 일반, 호랑이 그림, 민화 및 불화, 도자 및 조각, 결의 탄생 및 2019활동 상황,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의 완결, 미국전시 및 제3의 길을 찾다, 화운당 박종용의 꿈 등을 찾아본다.

 

만화작업 및 극장 간판 제작은 예술가 박종용 탄생의 용광로 역할

 

박종용 화백은 17세인 1969년 고향 함안을 떠나 상경한다. 물론 서울에서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으로 올라온 것이다.

▲ 박종용의 만화 ◇크기 : 각 30x26cm(가로x세로) ◇재질 : 각 화선지(닥종이)·잉크 ◇연도 : 각 1969년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당시 화가들의 선망의 고려민예사 소속 화가로 취업하면서 학업을 병행하게 된다. 고려민예사 화가로 취업한 후 당시 고려민예사 소속 젊은 화가 3〜4명과 같이 인사동 조계사 맞은편에 허름한 아틀리에를 마련하여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1969년 가을경으로 본격화가로서의 실질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1969년 늦은 가을 충무로 인쇄소 골목을 서성이다 어느 가계 창문에 “만화 그리는 사람 구함”이라는 광고문을 보았고, 이층으로 올라가 문의하니 우선 몇 점을 그려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틀 동안 만화 10여장을 그려서 보여주니 ‘실력이 출중하다’면서 만화를 그려 줄 것은 당부하면서, 장당 14원을 주겠다는 말도 했다. 박종용의 만화작업은 이렇게 시작됐고, 한 달에 100장 이상을 그려주어 어느 정도 수입도 보장됐다. 

 

당시 엄마 찾아 삼천리, 곰돌이, 영순이 등 수많은 만화를 그렸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는 이미지는 나무 옆 부부, 샤냥터, 일본군에 잡힌 남녀, 전쟁터, 마님의 침실, 쫓는 일본군과 달아나는 청년을 연상시키는 6컷 뿐이다. 모두 1969년 작으로 최초로 그린 만화 중의 일부이다.

 

이 만화그림의 의미 등에 관해 작가 박종용은 당시 만화뿐만이 아니라 초상화 민화, 불화(단청)까지 해내야하는 상황이었고, 한 달에 100장 이상의 만화를  제목에 따라 알아서 그려주었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이미지는 연결되지 않아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정성껏 만화를 그려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는지 만화 발주자가 극장 간판일도 소개시켜주어 극장 간판 하나당 4,500원 정도를 받고 수없이 영화간판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런 생활은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어쨌든 초기의 만화 및 영화간판 그리기는 전천후 예술가 박종용 탄생을 위한 용광로 구실을 한 것이다. 박종용의 예술은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발아되어 개화된 것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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