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 30

[제6기]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1950~1953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전

이세훈 | 기사입력 2020/06/30 [20:40]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 30

[제6기]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1950~1953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전

이세훈 | 입력 : 2020/06/30 [20:40]

[제6기]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1950~1953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전 

 

1947년 9월 26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대표가 한반도에서 외국군의 동시 철수를 주장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정부를 지원하며 1948년 8월 15일에 철수하여 12월 31일까지 종료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소련은 1948년 9월 북한정권의 철수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2월말까지 철수 완료를 발표한다. 미국도 이에 상응한 조치로 10월 19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한다.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수립과 점령군의 철수결의를 통해 점령국들은 조속히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키도록 결의한다. 12월 25일 소련군 철수완료가 발표된다. 미국은 1949년 6월 30일 최종 철수를 완료한다.

 

한반도의 38도선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힘이 직접적으로 맞선 최전선이 되었다. 미·소를 양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냉전 기운은 1948년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더욱 고조된다. 결국 북한이 무력으로 남침함으로써 냉전이 열전으로 바뀌게 된다. 한국전쟁은 미·소 갈등과 남북 갈등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 성격도 더욱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은 순식간에 한반도를 피로 물들게 했다. 한국군은 취약한 전력으로 기습을 대처하지 못해 결국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만다.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한 한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의 양상은 발발 6개월 만에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전 국토로 치열했다. 전쟁 동안에 전쟁 주체도 몇 차례 바뀌어 '민족전쟁, 이념전쟁, 국제전쟁'이라는 독특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신해 갔다. 민족의 운명도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깊은 국면으로 빠져 들었다. 

 

6월 25일 유엔 안보리는 무력도발의 중지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낸다. 6월 27일에는 한국에 대한 원조의 제공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유엔은 한국군을 도와 북한군을 격퇴하고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결의로 유엔군 파병을 결정한다. 전쟁은 북한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확대된다.

 

전쟁은 부산교두보 낙동강 방어선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치른다. 마침내 유엔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방어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북한군은 결과적으로 낙동강지역 돌파에 실패하고 만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작전으로 북한군의 전선을 단숨에 절단한다. 뒤이어 반격과 추격 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은 북으로 퇴각한다. 이때 일부의 패잔병들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으로 잠입하여 빨치산이 된다.

 

▲ 한국전쟁 발발과 낙동강 전선에서 휴전까지의 전선 


10월 1일 한국군이 먼저 38도선을 넘어 진격하고 이어 유엔군의 북진작전이 시작된다. 북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거쳐 청천강 선으로 진출한다. 이 무렵 김일성은 전쟁지도부를 강계로 옮기고 청천강, 희천, 강계에 3중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유격전으로 최후까지 저항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10월 24일 청천강을 확보한 유엔군은 국경선을 향한 총공세를 편다. 유엔군이 혜산진과 청진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뀐다. 이제 한국전쟁은 사실상 중국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바뀌어 전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2차례에 걸친 중국군의 공세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순식간에 38도선으로 밀려나게 된다. 북진을 개시한 지 71일 만에 철수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군은 3차 공세를 개시하여 38도선을 돌파한다. 결국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한다(1.4후퇴).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은 1951.1.27~6.10 기간 중 4차, 5차 공세를 무리하게 강행한다. 5차 공세는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최대 병력과 최대 규모의 장비를 투입한 마지막 공세였다. 

 

유엔군과 조선․중국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 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협상한다.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간다.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한다.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휴전협정 체결까지 38도선 상에서 양구 일대의 피의 능선고지, 단장의 능선고지, 해안분지 펀치볼, 연천 고양대, 철원 백마고지, 김화 저격능선과 금성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인다. 주요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이 전개된다. 이 시점에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 된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된 지 3년만인 1953년 7월 27일 북한군, 중국군 그리고 유엔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 된다. 이때 한국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선 분단선을 허물지 못하고 다시 휴전선을 경계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 

 

한국전쟁은 비록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끝을 맺었지만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3년간의 한국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어, 광복 후 5년간 공들였던 전기통신시설도 거의 파괴 되었다. 휴전 후 남북한 간의 관계는 대화나 협력이 아닌 대치와 도발로 이어진다. 치열한 냉전대결로 남북분단은 더욱 변화되지 않고 남북한 모두가 정치적으로 냉전유지에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세훈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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