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 32

[제6기]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1950~1953년) 한국전쟁과 전기통신 시설 잿더미

이세훈 | 기사입력 2020/07/07 [09:49]

[기획] 한국전쟁 70주년…한국의 전기통신 32

[제6기]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1950~1953년) 한국전쟁과 전기통신 시설 잿더미

이세훈 | 입력 : 2020/07/07 [09:49]

[제6기]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1950~1953년) 한국전쟁과 전기통신 시설 잿더미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감행된 북한군의 불의의 남침으로 통신시설도 북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날 오전 이미 개성우편국과 장서우편국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광복 후 공들였던 통신시설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서울중앙전신국으로 연결된 전신선은 사실상 통신이 불가능했다. 계속하여 파주․동두천․의정부가 점령당했으며 서울 시내로 침투해 오는 북한군 때문에 전화교환 역시 결국은 중단했다.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장악했다. 대구에 있던 체신부 위치도 계속하여 남하하는 전선으로 말미암아 1950년 8월 16일에는 부산체신청 건물로 옮기게 된다. 이미 북한군이 포항까지 점령한 후였다. 그러는 동안에 전세는 다시 역전되기 시작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점차적으로 반격을 개시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 월미도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16일 인천과 여러 섬 진입에 성공하여 9월 17일 서울로 진격한다. 9월 18일 김포비행장 확보, 9월 20일 행주산성 점령, 9월 22일 새벽 서울공격, 9월 27일밤 서울일대의 북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은 13일 만에 막을 내린다. 서울이 함락 된지 3개월 만에 서울수복(1950.9.22.~9.28)에 성공했다. 

 

1951년 2월 당시 부산에서 전화가 가능한 지역은 대구, 마산, 진해, 밀양, 삼랑진 정도였다. 전신은 천안, 공주, 홍성, 이리 정도에 불과했다. 전신전화업무는 대전, 공주, 예산, 천안 등의 우체국에서 불편한 대로 재개했으나, 통신시설의 피해는 컸다. 대전우체국은 화재 피해로 단식 100회선 교환대 2대, 시외교환대 1대를 대전건설국으로 옮겼다. 공주우체국도 시외교환대 1대만을 얻어 사용했다. 천안우체국은 유엔군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우선 임시 청사에서 14회선 교환기 1대를 사용하게 된다. 

 

▲ (사진 왼쪽부터) 100회선 교환대, 자석식교환대, 공전식교환대


1953년 4월 수복지구의 현업기관이 대부분 복귀한다. 체신부는 정부방침에 따라 장관 중심으로 중요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서울분실을 두고 240여명을 파견한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2년간 협상을 끝내고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상황은 통신시설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일반시설과 함께 통신시설도 1950년 6월부터 9월 사이의 초기 전투에서 대부분 파괴됐다. 

 

한국전쟁 중에 통신시설의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음향전신기는 358대의 80%, 전신전화 시험대는 55대의 76%에 달하는 파손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중에 전화시설은 대구, 부산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에 걸쳐 80% 이상이 파괴됐다. 

 

특히 전화시설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등 대도시 교환시설의 피해는 심했다. 중소도시나 농촌의 자석식 전화시설의 피해도 62%나 된다. 전쟁으로 전화교환시설이 완전히 소실된 국은 서울의 광화문, 용산, 영등포분국이다. 지방국은 수원, 안양, 대전, 춘천, 강릉, 목포, 전주의 8개 우체국이 파손됐다. 남아있는 시설 중 군산, 이리, 광주, 청주, 마산국은 파손이 심해 복구가 곤란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때의 전기통신은 일제가 대륙 침략 도구로 사용해 우리 국민의 편익은 완전히 무시됐다. 그리고 광복과 함께 통신권이 회복되었으나 곧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으로 통신시설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휴전과 함께 파괴된 통신시설을 복구하는 한편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통신의 자주권을 회복한다. 공중통신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의 확립과 통신의 자유권을 확보하는 시기였다.

 

전쟁 이후 시대는 피해복구의 긴급성과 국가재건을 위한 사회 간접자본 시설로 통신 및 우편시설의 빠른 운영이 제일의 목표였다. 때문에 양적인 확충에 급급했으며 질적인 향상에는 소흘한 감이 없지 않았다. 마산, 광주, 인천, 제주, 광화문, 서울중앙, 영등포 분국 등이 당시에 준공된 통신건물들이다.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조 2-4층 몰탈 마감 페인트칠 또는 타일마감이 주종을 이루었다. 외관은 그래도 창틀을 둔 일반건물과 유사한 외관이었다. 

 

이세훈 

한국경제문화연구원 ICT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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