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운당 박종용 화백, 신화적 스토리를 넘어 본질을 찾는 장인의 구도적 작품세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미술평론 당선작]

박준아 | 기사입력 2020/07/24 [19:24]

화운당 박종용 화백, 신화적 스토리를 넘어 본질을 찾는 장인의 구도적 작품세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미술평론 당선작]

박준아 | 입력 : 2020/07/24 [19:24]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미술평론 당선작]  

 

▲ 박준아 미술평론가 

화운당 박종용 화백, 신화적 스토리를 넘어 본질을 찾는 장인의 구도적 작품세계

 

화운당(花雲堂) 박종용 화백의 굴곡진 인생의 드라마 만큼이나 세간엔 그에 대한 무수한 전기적인 글들이 존재한다. 일찍이 박종용 화백은 12살 때 화투 그림 등을 그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림신동’이란 소리를 듣고는 예술가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박종용 화백의 예술가의 길 60년 기나긴 세월은 분명 순탄치 않았다. 이미 대가로서 인정받는 그의 삶은, 혹자에게는 근대 한국미술의 아이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중섭의 굴곡진 삶에 비해지니 말이다.

 

 그는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부터 가혹한 현실상황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딛고 일어났다. 당내 거장들로부터 인정받아 ‘최고의 필력이다’ 라는 찬사를 받았다. 더불어 전시를 위해 간 미국에서 즉석에서 불화를 그려낸 사건들을 더해 그의 역사는 신화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방송에서 즉석적인 작품 시연을 한 일은 이러한 그의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2019년 3월 KBS 춘천방송총국에서 ‘결의 행진곡’ 초대전을 마친 후 KBS 문화산책 박종용 편 ‘흙속의 결을 찾아’란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작품 시연을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한 작품당 20분씩 세 작품을 한 시간 내에 마쳐 달라는 요구였다.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로 명성이 자자하니 그 점을 확인하고 싶다” 고 추켜세우며 시험하는 듯한 요구에 작가는 내색하지 않고 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파스텔화 3점(백담사 다리, 백담사 후문, 백담사 종각)을 완성했다. 이는 제작진의 요구를 모두 만족 시키며 완성한 결과였으며, 60년 성상에 이른 가혹한 수련이 가능케 한 일이었다.

 

 작가의 드라마가 그의 작품 자체의 드라마를 만들고 가치를 갖는 일은 새로울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다. 작품의 가치가 시장경제의 가치 바로 그것이며 드라마는 작품의 시장경제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논리는 신자유주의, 현시대를 살아가는 메커니즘으로서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가 경제논리와 함께 작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좋다 나쁘다’로 나눠지는 가치판단의 영역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삶이 집약된 것이 곧 그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글쓴이는 여기서 그의 작품 자체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글을 쓰고자 한다. 또한 이는, 해당 글의 목적임을 밝혀 둔다. 세간의 글들에서 받은 이미지처럼, 그의 작품이 드라마의 부수적인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작업들 중에서도 2018년도를 중심으로 한 최근의 작품들을 주목하고자 한다.

 

박종용 화백은 예술에 입문하면서부터 거의 모든 매체를 다뤄왔다. 그는 평면과 입체작품, 만화와 도자기, 간판, 동양화와 서양화, 불화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을 망라하며 장인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러던 중 2005년 무렵부터 그는 그간의 작업(대상의 재현)과 다른 추상작업을 시작한다. 그에게 계시처럼 내려왔다는 자연의 본질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갈구는, 곧 미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추상작업을 통해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 본질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것이다.

 

그가 찾아낸 자연의 본질적 표현은 세상 만물이 지닌 ‘결’의 표현이었다. ‘결’이란 사전적 의미로 나무나 돌, 살갗 등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를 말한다. 두개 이상의 서로 다른 물성에 의해 구분되어지는, 혹은 같은 물성 안에서 질감이나 요철로 구분되는 미묘한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차이들을 조형적 언어로서 우주(코스모스)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다.

 

‘절대주의회화’와‘ 결’

 

그의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은 재미있게도 1910년대 초 짧게 등장했지만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출신의 작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1978-1935)로부터 태어난 절대주의는, 기존의 낡은 회화를 탈피한 완전한 회화의 해방을 표방하며 탄생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편린의 하나로서 절대주의는 1913~1917 짧은 기간 등장하여 러시아 본국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책 변경과 함께 소멸한 운동이지만, 그 이념은 널리 유럽에 퍼진 추상미술의 저류가 되었다. 

 

말레비치 또한 이전 박종용 화백이 재현의 세계에 몰두했듯, 처음엔 인상주의적인 화풍의 대상을 재현하는 전통적 회화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여느 모더니즘 화가들이 느꼈듯이 회화의 한계를 느끼고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받아 ‘대상에 갇힌 회화의 한계’ 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말레비치는 말한다. “자연의 대상을 곧바로 빌어오지도 변형시키지도 않은, 단지 회화 자체의 공간분배에서 비롯된 형태가 화폭 위에 출현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창조라 할 수 있다”고. 말레비치에 의하면 이 화면은 무슨 상징도 기하학도 도안도 아니며, 내면의 질서에 따라서 스스로 형성되고 구성된, '자연을 훨씬 초월한 순수한 감각'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감각 바로 그것의 표현을 그는 '절대'라고 선언한다. 말레비치가 ‘절대’라고 표현한 단순한 형태와 무채색의 화면은 박종용 화백이 말하고자 하는 자연의 본질에 대한 순수한 감각의 표현인 ‘결’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 <도판1>말레비치,검은 사각형, 린넨에 유화, 795 x 795, 1915 

 

말레비치가 말한 “왜 나는 사각형을 연필로 검게 칠하는가? 그것이 인간의 감수성이 할 수 있는 가장 겸허한 행동이기 때문이다...”라고 작품에 담긴 정신성을 설명하는 내용은 박화백이 직접 작가노트에서 밝힌 “’두 번 다시 긋게 되어서는 안 되는 필력의 일동(획)성과 그 자체의 완결미 및 그 과정에서 허용되는 우연의 가능성 포용’ 등은 예부터 또 다른 동양적 미학의 표상인 ’선은 불의의 문’이라는 정신적 인식과 같은 세계다.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의 월면불(月面佛), 일면불(日面佛)의 원리인 것이다.”라고 밝힌 철학과도 상통한다. 둘에게 작품은 ‘밀교적 수행으로서의 정신적 에너지의 집약체’인 것이다.

 

다만 말레비치의 ‘절대’적 표현이 자연을 초월한 정신체의 발현이라는 현상계 자연과 비가시적 이데아라는 서양의 전통적 이분법적인 시각에 의한 것이라면 박종용 화백은 ‘자연’을 정신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았다는 동서양의 자연에 대한 인식차이가 있다

 

▲ <도판2>말레비치,흰색 위에 흰색, 캔버스에 유화, 794x794, 1918

 

▲ <도판3>박종용, 무제(결), 캔버스에 고령토, 1455 x 970,2018 

 

이러한 동서양 인식차이에 의한 자연관 때문인지 둘의 시각의 차이는 재료사용에서 두드러진다. ‘절대’적 회화의 표현을 하고자 하는 말레비치는 그 자체의 형상만이 큰 상징성을 갖는 것에 그치지만, 박종용 화백의 ‘결’시리즈는 형상을 넘어서 작품의 재료사용에서도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결이란 먼저 언급했듯 물성의 차이 또는 같은 물성 안에서 생기는 요철이나 질감에 의한 미묘한 차이이다. 목재 · 금속 · 도자기 · 플라스틱 등 모든 물질들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 발생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각기 다른 고유의 특성을 갖고 생성된다. 그러한 대상들은 고유성을 갖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흔적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나무의 나이테도 ‘결’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이테는 나무의 물리적인 시간, 성장속도 더욱이 가뭄이 들거나 하면 나무의 생장 속도가 느려져서 나이테의 폭이 좁아지므로 나이테를 이용해서 예전 기후를 추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결’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흔적이기 때문에 외면상의 패턴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자연히 생성되거나 쌓여가는 그 대상의 역사 자체이다.

 

박종용 화백은 자연의 ‘결’에 대한 물성을 재료에도 담고자 한다. 마대에 흙을 곱게 걸러 아교와 섞어 캔버스나 마대위에 점을 찍어 화면을 채워나간다. 일정한 점을 찍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상태의 흙의 점도나 아교와의 혼합율을 조절해야 하고, 그에 따른 붓 터치 또한 정교해야 한다. 젊은 시절 단청과 불화를 그리며 익힌 경험을 녹여낸 재료의 사용은 그의 역사와 철학 모두를 담고 있는 셈이다.  

 

<도판3>은 흰색화면으로만 이루어진 ‘무제(결)’시리즈 작품 중 하나다. 그림을 보면 하얀 배경 위로 흰색의 다른 어떤 것이 더해지며 무늬 같기도 한 화면이 어슴푸레하게 하지만 곧 분명하게 상을 이룬다. 이 미니멀한 작품은 작가가 추구한 ‘결’의 단편이다. 같은 흰색이지만 배경과 재료는 화면 안에서 물성의 차이로 생겨난 경계를 통해 구분되며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또 그 이미지는 뽐내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원형을 중심으로 퍼지는 듯한 한 작은 형태들은 일률적인 간격으로 화면 안에서 스스로 파형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하지만 자연스럽게 운동한다. 

 

재료와 형상들이 작가의 세계관과 함께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회화’와 박종용 화백의 ‘결’시리즈가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말레비치는 사물을 복제하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새로운 사물 그 자체’를 창조하고자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그의 시도는 ‘정신(이성)’만을 담은 단편적이고도 차가운 0 도의 세계 안의 ‘어떤 것’을 창조해 냈다. 반면에 같은 ‘무채색의 세상’이지만 우리는 박종용 화백의 작품 안에서 따뜻함과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프랙탈 우주론적 세계관’

 

다른 시각으로 박종용 화백의 ‘결’시리즈는 <도판6>과 <도판7>을 비교해 보면 쉽게 픽셀화 되어 형태를 이루는 ‘세포’를 연상시킨다. 또 <도판4>와 <도판5>를 보았을 때는 별의 일주운동의 형태와 유사함을 볼 수 있다.

 

▲ <도판4>박종용,무제(결),캔버스에 고령토,1600x1300, 2018

 

▲ <도판5> 별의 일주운동 

 

▲ <도판6> 박종용,무제(결), 흙·마대·석채, 500x500, 2017 

 

▲ <도판7> 식물의 세포 

 

어느 날, 밤하늘 수많은 별을 보면서 불현듯 계시처럼 왔다던, 우주(자연)의 본질을 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추상적인 형태로 발현하였다. 그 형태가 가장 부분적인 단편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세포의 형태’와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별의 일주운동의 형태가 함께 닮아있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아이러니다.  

 

크기라는 것은 단순한 의미로 분명하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면서도 <도판7>를 보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고 마찬가지로 은하의 사진을 보면 얼마나 큰지 가늠이 가지 않기도 하다. 더군다나 유사한 형태의 것들이 모여서 다시 처음의 유사한 형태로서 결집되고 거대해진다면 더욱더 이에 대한 혼란은 가중 될 것이다. 

 

이러한 세포단위의 미시적 세계와 우주적 공간이라는 거시적 세계의 유사성과 상통함에 대한 이론이 있다. 바로 ‘프랙탈우주론’이다. 

 

‘프랙탈우주론’이란 쉽게 설명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를 하나의 입자라고 보고, 그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입자들 속에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재현되고 있다는 이론이다. 홍채가 성운과 비슷하게 생겼고, 인간의 신경 세포가 우주 거대 구조와 흡사하며, 세포의 분열 과정이 별의 죽음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등의 예를 그 증거로서 제시한다.

 

‘프랙탈우주론‘은 마치 과학에 대한 국한된 이론인 듯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하면 ‘자연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 본질적 물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명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원론적 물음으로도 연결된다. 현상적 자연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역설적으로 오직 이성과 관념 안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세포단위의 세계나 우주의 공간은 일반적인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는 인식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지극히 개념적인 공간이다.

 

이것은 작가가 정신적 에너지로서 표현하는 세계가 관념적 추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시 유기성을 갖는다. 박종용 화백의 ‘결’시리즈가 직접적으로 ‘프랙탈구조’를 갖는 것은 아니나 ‘프랙탈우주론’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다. 더불어 박종용 화백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찍은 점들은 일률적으로 보이지만 각기 다른 철학을 갖은 개인이며 이들이 모여 가족(작은 사회)을 만들고 점점 되풀이되고 확장되며 켜(‘결’)를 일으켜 사회를 구성하는 모습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맞아 떨어지기도 하다.

 

‘프랙탈우주론’이 진리이고 우주의 신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자연과 그 속의 개체들의 유기성에 대하여 보여주는 단편적이지만 가장 확연한 이론으로서 박종용 화백의 철학과 닮았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수많은 그의 전기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글들에 알 수 없는 묘한 불편함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신화적인 작가의 드라마로 포장된 비싼 재화로서의 작품은 나쁜 것인가? 작품의 경제적인 가치에 대한 논의로서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숭고해야만 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100년도 전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미술의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알 수 없이 묘하게 불편했던 원인을 찾자면 그러한 신화적인 스토리로 만들어진 아우라가 그의 작품의 논지를 흐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결’이라는 큰 방향성과 철학을 담으면서도 작품의 제목을 두지 않고 관객에게 유연히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친절이 있고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이미지, 작가의 기술, 재료 모든 것이 작가의 철학과 유기적인 개연성과 당위성을 갖는 훌륭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형식의 작품이 전시되고 평가되는 현대사회의 코드에서 고전적으로도 보이는 장인의 구도적 성격을 띄는 그의 작품들이 더욱이, 그의 드라마와 더불어 더욱 특별하게도 느껴진다는 것이 역설적이고 재밌는 점이다. 감각과 자극을 좇아 쏟아져 나오는 가벼움에 둘러 쌓여진 사회의 한 켠으로는 여전히 크게 갖고 있는 무게감 있는 예술품으로서의 작품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인걸까. 이러한 맥락들 때문인지 미국의 굴지의 갤러리도 점지했다는 박종용화백의 작품들을 앞으로도 기대해 본다. 

 

2020. 07. 24.  미술평론가 박준아

        

[평론가 소개] 박준아는 1988년 3월생으로 이화여대부속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의 현대미술과(매체전공)와 철학과를 졸업했다. 영상작업과 설치작업을 중심으로 작가를 꿈꾸다, 미술이론과 미학에 흥미와 필요를 느껴 철학을 전공한다. 졸업 후, 2015년 독일로 출국하여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견학하면서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견문을 넓혀오다 2020년 3월 귀국한다.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 부터 ‘박종용화백에 대한 비평’으로 신인평론에 당선되면서 평론가로 데뷔했다. 풍부한 식견과 예리한 관찰력을 겸비한 평론가로 향후 활발한 활동이 기대된다. (장석용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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