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의 수행과 노동, 그리고 예술실험을 통한 원리 탐구

박우찬 | 기사입력 2020/07/27 [10:04]

묵언의 수행과 노동, 그리고 예술실험을 통한 원리 탐구

박우찬 | 입력 : 2020/07/27 [10:04]

묵언(默言)의 수행과 노동, 그리고 예술실험을 통한 원리 탐구

 

1.

미술이 탄생한 이후 미술은 간절한 꿈이 있었다. 그것은 박진감 넘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생생하게 재현(再現) 하는 일이었다. 화가들은 현실의 리얼한 재현을 위해 원근법, 해부학, 명암법 등을 발명했고, 이 놀라운 도구들을 이용하여 박진감 넘치는 현실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미술가로서 박종용의 관심사도 주변 현실을 리얼하게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빼어난 묘사력을 바탕으로 원하는 세계를 화면에 그려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수 있었다. 풍경에서부터 인물과 동물 그림, 그리고 상상의 신선세계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다양했고, 그는 원하는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그려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재현이라는 마술 같은 그림의 세계에 만족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박종용은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술의 본질이 사물의 겉모습, 즉 이미지를 물감으로 재현하는 일이란 말인가?” “사물의 외관을 본 떠 묘사하는 재현작업이 미술의 진실이란 말인가?” 박종용은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진짜 자연의 본질 표현에 매진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찾아낸 자연의 진실은 세상 만물이 지닌 ‘결’의 표현이었다. 

 

▲ (왼쪽부터) ◆무제(결). 재료 : 흙·마대·아교. 크기 : 130×162m(가로×세로). 연도 : 2017년 ◆무제(결). 재료 : 흙·마대· 파이프. 크기 : 112×145m(가로×세로). 연도 : 2018년 ◆무제(결). 재료 : 흙·마대·아교. 크기 : 45×53m(가로×세로). 연도 : 2018년 ◆무제(결). 재료 : 흙·마대·아교. 크기 : 130×162m(가로×세로). 연도 : 2019년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결은 나무나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를 말한다. 세상 만물은 각기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지니고 있다. 결은 미세한 요철이나 조직의 상태로부터 느껴지는 물체 표면의 느낌을 말하는데, 금속 · 도자기 · 플라스틱 · 유리 · 목재 · 종이 · 옷감 등 모든 물체는 각기 다른 특유한 재질감을 지닌다. 결은 외모를 꾸미거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결은 세상 만물이 태어나 오랜 시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며 만들어진 결과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후 지상에 생겨난 세상 만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왔다. 결은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결은 단순한 외면상의 패턴이 아니라 그 물체의 역사이며 그 자체이다. 

 

2.

 

대상이 없어진 박종용의 화면에는 다른 무엇이 드러난다. 캔버스와 그림을 구성하는 재료들의 미묘한 물성(物性)이다. 박종용은 매순간 정신을 집중하여 정교하게 한 점, 한 점 열정을 다하여 색 점을 찍어나가며 세상만물의 결을 형상화해 나간다. 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은 오랜 시간 동안에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박종용의 작업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박종용의 작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 묵언(默言)의 수행이자 노동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흙, 돌, 나무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재료를 이용하여 변화무쌍한 자연과 인공의 관계를 작품으로 구현하는데, 그의 작업에서 흙과 캔버스와의 만남은 매번 다른 형상으로 쌓여간다.

  

무수한 색 점들이 화면에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는 박종용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영감과 직관에 의존한 작업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재료와 색채에 대한 연구의 결과이다. 규칙적인 색 점들의 나열로 보이는 그의 작업은 자세히 보면 한 점, 한 점 크기와 균형이 각기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은 동일해보이지만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과 철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박종용의 회화 작품은 때론 둥글게, 때론 한 줄로 평범한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색 점들의 간격과 크기, 각기 다른 모양이 만드는 한편의 파노라마를 펼쳐낸다. 

 

박종용이 캔버스에 색 점을 찍는 일은 단순한 일상적 행위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숨을 내쉬며 찍고 숨을 들이쉬며 찍는 작품의 탱고를 추는 것과 같은 긴장감 넘치는 작업이고 처음 출발할 때의 기대와 끝남의 희열도 느낄 수 있는 작업이다. 특히 순백의 흰 색과 고급스러운 멋의 구현은 오랜 시간의 색채연구와 단청을 그리면서 아교와 단청 흙의 장점을 파악하여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오랜 노력의 결과이다. 

 

매순간 한 점, 한 점에 열정을 다하며, 붓의 누름이 세게 눌리거나 적게 눌림에 따라 점의 크기가 달라지고 원의 중앙을 향해 방향을 맞추어가며 통일된 크기로 작품을 제작해 나가는 박종용의 회화 제작과정은 고도의 정신집중과 열정의 결정체이다.

 

3.

 

오랜 시간, 많은 생각 끝에 작품구상이 이루어지지만 작가 박종용에게도 재료의 조합과 작품의 형상화는 항상 어려운 일이다. 물•아교•흙의 조합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되는데, 생각과 결과는 늘 예측하기가 힘들다. 물이 적으면 색 점이 커지고 물이 많으면 색 점이 작아진다. 또 아교가 적으면 접착력이 약해 흙이 부스러지고 아교가 많으면 흙이 딱딱해지고 색상이 변한다. 흙•아교•물 등이 적당히 배합되어야만 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밤낮으로 하는 작업이지만 좋은 작품을 제작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 

 

박종용의 작품 실험은 오랜 동안의 자연관찰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다양한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지만 그는 자연의 완벽한 조화에 늘 감탄하곤 한다.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로 상징되는 삼라만상이 서로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자연의 조화는 언제나 그를 감동시킨다. 특히 박종용을 감동시킨 것은 돌과 무쇠의 결합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이 두 재료를 결합시키면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시간이 나는 대로 냇가로 달려가 돌을 골라 줍고 철공소에서 돌과 무쇠를 잘라내 마음에서 그려본 작품을 시도해보았다. 

 

박종용은 오래 전부터 제한된 캔버스를 벗어나 현실공간을 캔버스 삼아 자유롭게 표현하고픈 충동을 느껴 왔는데, 그 충동은 설치미술 Installation Art 로 실현되었다. 전통적인 작업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완성되어 전시장에 옮겨져 진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설치미술은 설치될 장소의 조건에 따라 작품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 그리고 작품이 놓일 환경과 작품제작의 과정 중에서 일어나는 감성의 변화가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설치미술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작품이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설치미술은 박종용의 작업세계가 보다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왼쪽부터) ◆무제(결). 재료: 마대배접·마대 ·흙·파이프. 크기 130×270cm(가로×세로) 연도 : 2017년 ◆무제(결). 재료: 마대배접·마대 ·흙·파이프. 크기 130×270cm(가로×세로) 연도 : 2017년 ◆무제(결(자연과 문명). 재료 : 철판·돌. 크기 : 각 150×300m(가로×세로). 연도 2018년 (아래) ◆무제(결. 자연과 문명). 재료 : 나무·돌(화강암). 크기 : 각 300×300m(가로×세로). 연도 : 2018년 (사진=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20세기의 현대미술은 진보적인 작가들의 실험정신에서 나왔다. 현대 미술가들은 새로운 미술을 만들기 위해 조형실험에 매진해왔다. 표현주의•입체파•미래파•추상미술•설치미술•퍼포먼스•대지미술 등의 새로운 미술은 전적으로 작가들의 실험 정신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박종용의 지칠 줄 모르는 실험정신은 그의 작업을 보다 자유롭고 흥미진진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4.

 

박종용은 묵언(默言)의 수행과 노동, 그리고 예술실험을 통해 세상만물의 원리(原理)를 탐구하고자 한다. 원리란 근원(原)이 되는 이치(理)이다. 먼 옛날부터 인간들은 세상의 원리를 탐구해왔다. 세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시간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죽음 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 등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처음, 주변의 단순한 관찰에서 시작한 원리 탐구는 세상만물의 근원에 대한 원리로부터 인간과 자연, 사회와 세계, 도구와 테크놀로지, 우주로까지 그 범위를 넓혀왔다. 

 

박종용은 왜 세상만물의 원리의 탐구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염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염원은 미시세계에서 현실, 그리고 우주를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찾아내는 것이다. 통일장이론은 우주의 근본 물질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 theory of everything이다. 인류 최고의 천재 아인쉬타인은 우주만물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는 통일장이론을 갈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날 양자과학이 통일장이론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현재 인간의 지식으로는 세상과 우주는 너무나 미스터리한 곳이다. 

 

오래 전 원자(atom)를 찾아낸 과학은 계속하여 작은 입자를 찾아냈고 마침내 양자에까지 이르렀다. 양자(量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량의 단위인데, 양자 같은 미립자(微粒子)의 추적은 왜 중요한가? 왜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여 입자가속기를 만들려는 것인가? 거기에 우주의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미립자의 세계를 알아야 우주의 진정한 원리, 즉 미시세계와 현실, 그리고 매크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통일장이론을 완성시킬 수 있고 우주를 만든 조물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박종용이 한 점 한 점씩 찍어 만들어내는 예술작업은 통일장 이론을 찾아 세상만물의 원리를 찾아내려는 현대 물리학자의 작업에 다름 아니다. 박종용이 한 점, 한 점 열정을 다하여 색 점을 찍어나가며 만들어나가는 결에는 삼라만상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통일장이론을 얻으면 석가나 노자•플라톤이 말하는 공(空)•도(道)•이데아(Idea)같은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석가나 노자•플라톤 같은 현인들은 하나 같이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공(空)•도(道)•이데아(Idea)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인쉬타인이 그토록 원했던 통일장이론을 얻더라도 석가나 노자•플라톤이 말하는 절대 진리에는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은 통일장이론이나 그 어떠한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신비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박종용의 원리에 대한 탐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학자도 아니고 그의 작업은 과학이 아니다. 그는 예술가이다. 무수한 색 점들이 화면에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는 박종용의 작품세계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변화를 추구한다. 그것이 예술가로서 그가 생각하는 세상만물과 우주의 원리이다. 규칙적인 색 점들의 나열로 보이는 그의 작업은 한 점, 한 점 크기와 균형이 각기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박종용의 회화 작품은 때론 둥글게, 때론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색 점들의 간격과 크기, 각기 다른 모양이 시시각각 변화하며 만들어지는 한편의 파노라마이다. 

 

2020. 07. 24.  미술평론가  박우찬 

 

[편집자 주] 박우찬은 서울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 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정책을 전공했다. 경기도립미술관장과 경기창작센터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원 및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발한 작품평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동양의 눈, 서양의 눈>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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