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세계를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풀어내는 법관 화백(1)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0/08/18 [12:46]

선(禪)의 세계를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풀어내는 법관 화백(1)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0/08/18 [12:46]

법관스님(이하 ‘법관 화백’)은 매우 특이한 존재다.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의 번뇌와 오온(五蘊)의 고통이 지배하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탈속, 불가에 귀의하여 40여년의 세월동안 수행 정진하는 선승(禪僧)으로서, 36년 성상에 걸쳐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범상치 않은 예인(藝人)이다. 우주의 원리를 자신의 물성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법관화백의 예술세계를 조명해 본다. 

 


선(禪)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해 나가는 법관 화백


 

1980년대 중반 경북 지역의 한 토굴에서 수행정진 중 붓을 들어 화업을 시작한 법관 화백의 예술세계는 어언 36년의 성상을 지나가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도 없는 운명의 회로에 따라 이렇게 시작된 그의 예술세계는 이후 전국 각지의 토굴(사찰)을 옮겨 다니면서 수행정진 하는 과정에서 전변을 거듭하면서 급기야 무극(근원)의 세계를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세월의 풍상 속에서 정열과 기품이 간연(間然)]함 없이 융합되어 인간자체가 예술의 원형으로 주조되어 가고 있다. 운명적 예술가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법관 화백 창작하는 모습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그간 상당수 평론가들은 법관 화백의 예술세계를 ‘선승에 의한 선화’로 표현하면서, 이를 특장 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풀이하면 참선하는 승려(법관)에 의해 작화된 절집미술이란 뜻이다. 물론 법관 화백의 예술세계는 불국정토를 향한 수행정진의 과정에서 발원되었다. 더하여 각종 불교경전들과 관음보살화, 팔상도, 비로자나불화, 아미타불화, 53불화, 천불화, 나한도, 조사도, 제석·신중화, 지옥계 불화, 칠성탱화, 산신도 등 갖가지 ‘불화(佛畵·탱화幀畵)’들을 통해 불국정토를 꿈꾸면서 수행정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그의 인생과 예술 궤적에서 단청의 화려하고도 강한 이미지가 비춰지는 흔적들에서 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수월관음의 형상들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붓을 든 수월관음(법관) 말이다. 마치 붓을 든 수월관음의 현세적 재현처럼 보인다.

 

법관 화백은 자신의 예술세계와 관련하여, “우주를 담아낸 듯 촘촘히 엮어진 그물망 같은 선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려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수많은 점들은 찍었을 때 확장하려는 힘과 막으려는 선들의 충돌에서 생기는 작은 에너지들을 만들어 시선을 좀 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도록 하면서 공간 확장을 통해 여백을 만들기도 한다. 밤하늘의 별빛과 먼 도시의 불빛을 연상케 하는 정형화 되지 않은 화면은 담담하면서도 무한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선(禪)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기도 한다(작가메모1)”고 피력했다. 그의 예술세계 이념과 지향점 등이 집약되어 있다. 

 

▲ ‘빈손으로 왔다가네’ 화선지에 수묵담채. 64×134cm(가로×세로). 1994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작가 노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법관 화백이 풀어내고자 하는 예술세계는 우주(삼라만상)의 신비다. 점과 선들이 환상적으로 교합하는 법관의 예술은 사물의 근원(우주)에 대한 탐험이며, 영원을 갈구하는 ‘생명예술’의 또 다른 표현이자, 시간(역사)의 흔적이며 수행으로 잉태된 ‘선(禪)의 미학’이다. 그러므로 법관 화백에 있어서는 수행이 그림이며, 그림이 수행으로서 그림과 수행은 일체 불가분의 상태인 것이다. 법관 화백 역시 “...그림은 곧 나요 나는 그림이다.(작가 메모2)”라면서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이렇듯 법관 화백에 있어 그림은 또 다른 의미의 (불교)경전이며, 자신을 비추는 수행의 거울인 것이다.

 

법관 예술의 우선적 특징은 빙하를 깨면서 자연이 생성되는 원리를 찾아 나가는 근원의 예술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법관 화백은 이를 물성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수행을 거듭하면서 경계를 넘기 위해 지성의 노력을 기울여 가고 있는 상황이다. 감천을 향한 지성의 노력 과정에서 땀방울로 얼룩진 결정체들이 무위(無爲)적으로 서서히 형상화 되었다. 이는 우주의 운행원리와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노동으로 잉태된 ‘선(禪)의 미학’으로서, 선(禪)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으로 시간(역사)의 흔적이며, 생(역사)의 기록이다. 

 

묵언(黙言)수행을 통하여 자연과 교감하면서 본원(근원)에 근접하려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우주의 원리가 변화무상하게 흘러가는 것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청색, 붉음 등으로 점철되고 덧칠된 화면에서 천년고찰과 같은 원로한 선원의 미를 연상케 하면서,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 오브제들이 생명을 유지에 주길 바라는 갈망과,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하여 외치는 예리한 긴장감, 대지의 균열 속에 흘러가는 시간의 흔적들이 남기는 안타까움 등이 절묘하게 공존하면서 명상과 신비의 판타지아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는 본원에 육박하려는 의지의 발로로서, 선(禪)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의 흔적(역사)들이다.

 


벽산(碧山)을 향해 붉음을 토해내는 구도(求道)의 선(禪)예술


 

법관 예술의 구체적 특징은 벽산(碧山)을 향해 붉음을 토해내는 선(禪)예술이다. 즉, 깨달음을 향해 자신을 불태워가는 가는 구도(求道)의 예술인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세세히 살펴보면, 맑고 투명한 영혼의 손끝으로 빛과 같은 우주의 심장을 빚어내고자 하는 염원들이 오롯이 녹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작품들이 “...격렬한 마음을 지나 순화된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전달되어 특별한 마음이 아닌 평상심으로 안정되고 편안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으면 한다(제작메모3)”는 푸른 바람의 욕망도 일렁거리고 있다.

 

작가론(作家論)의 기본적 요소는 ‘풍부한 영감(독창성)’ ‘기술적 세련도(필력)’ ‘치열한 작가정신’ 등으로 대별된다. 이런 점에서 살펴보면 작가 법관은 이를 비교적 골고루 갖춘 영락없는 작가라 할 것이다. 어쨌든 법관 화백은 삶의 종점까지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울 것을 다짐하고 있는 36년 화력(畵歷)의 작가로서, 특히 예술에의 의지와 정감에 가득 찬 희귀한 품성의 작가다.

 

▲ ‘선(禪)’ 석채·혼합재료. 324×260cm(가로×세로). 2011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1984년 화업을 시작한 이래 전국 각지의 토굴(사찰)을 옮겨 다니면서 수행 정진하는 과정에서 일시도 붓을 놓을 적이 없었으며, 특히 1999년 강릉의 능가사를 창건하여 안거한 이후부터는 하루 14〜15시간에 걸쳐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그의 예술들은 수행과 땀방울로 나날이 영글어 간 것이다. 이런 과정에 작품들은 여러 번의 변환기를 거치면서 질적 변화를 거듭했고, 무한(근원)의 예술을 향해 힘찬 붓놀림을 계속하고 있다. 가히 천성의 작가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관람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현실이나,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근원을 갈구하는 선(禪)수행 예술이며, 이는 종교적 차원을 뛰어넘는 ‘예술은 감동’이라는 미의 진리에 맞닿아 있는  본질적 문제다. “산사생활 정진 중에 내 속에 있는 생각들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내 모습을 보인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보셨으면 합니다. (2006년 ‘심상 심류’전 인사말)”는 법관 예술의 함의를 대변하고 있다.

 

법관 화백은 차디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불멸의 야생화 인생을 다짐하면서, 우주의 근본원리와 미의 진리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하여 예술의 용광로에 몸을 던져 육신을 불태우고 있다. 우주의 본질에 육박하는 근원의 예술을 갈망하면서, 30년 이상에 걸쳐 엄혹한 수행 등을 통해 화엄의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주의 근본원리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표현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형상의 작품들이 저절로 탄생됐다. 무엇을 의식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고 땀방울을 흘리는 과정에서 저절로 표현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화 된 오브제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으며, 구슬땀을 흘리면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형상화 된 것이기에 선(禪)예술이라 통칭되는 것이다.

 

작품 창작과정 등과 관련해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 그의 그림에는 무수한 빗금들이 존재한다.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무수한 선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화면 위에 공존한다. 그렇게 해서 기왕에 그려진 선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선들이 자리 잡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다시 화면 바닥으로 가라앉고 다시 새로운 선들이 나타난다. 이 선들의 공존은 융화(融和)의 세계를 이루며, 세계는 다시 반복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법관의 그림은 따라서 완성이 아니라 오로지 완성을 지향할 뿐이다” 라고 평가했다.

 

▲ (좌)‘선(禪)’ 석채·혼합재료. 130.3×162.2cm(가로×세로). 2014년 (우)‘선(禪)2019’ 캔버스에 아크릴. 72x91cm(가로x세로). 2019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이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고요와 명상 및 운율과 시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주를 향하여, 만다라, 생명의 울림, 대지의 균열, 봄이 오는 소리, 신비의 이국 세계, 동행, 파노라마, 허공의 외침, 기원” 등을 연상케 하는 갖가지 명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면서, 어찌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영감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각 오브제마다 각자 다른 고유의 독창성을 내뿜으면서 마치 아침을 알리는 고요 속에 꿈틀거리면서 관람객들을 고요와 명상의 비행선에 태워 우주를 향하여 운행하고 있다. 일러 ‘우주를 향한 신비와 명상의 예술’로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겠다.

 

작품의 특성과 관련하여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 ...선이 올라가고 색채가 칠해지고 그로인해 바탕 면(흰색)이 슬쩍슬쩍 드러나면서 화면은 미묘한 층을 이루고 깊이를 만들고 공기가 넘나드는 통로를 만들어준다. 선들이 만들어 놓은 자취를 쫓다가도 그 사이에 남겨진 여백의 틈으로 시선이 빠지기도 한다”면서 법관 예술의 신묘함을 함축적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어쨌든 법관 화백의 추상예술세계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은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 이를 위한 수행 과정에서 우주의 본원(삼라만상)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무의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흥의 미학’을 넘어 대원일의 원상(圓相)을 연상시키는 경건함과 엄숙함마저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벽산(碧山)을 향해 붉음을 토해내는 구도(求道)의 선(禪)예술인 것이다. (계속)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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