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세계를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풀어내는 법관 화백(4)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0/08/21 [10:38]

선(禪)의 세계를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풀어내는 법관 화백(4)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0/08/21 [10:38]

법관스님(이하 ‘법관 화백’)은 매우 특이한 존재다.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의 번뇌와 오온(五蘊)의 고통이 지배하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탈속, 불가에 귀의하여 40여년의 세월동안 수행 정진하는 선승(禪僧)으로서, 36년 성상에 걸쳐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범상치 않은 예인(藝人)이다. 우주의 원리를 자신의 물성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법관화백의 예술세계를 조명해 본다.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탄생된 작품들이 우주를 비행해 주길 염원

 

법관 화백 예술세계 조명시리즈(1〜3)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법관화백(스님)은 40여년의 세월동안 수행 정진하는 선승(禪僧)이자 고승(高僧)이며, 36년 성상에 걸쳐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범상치 않는 예인(藝人)으로서, 선(禪)수행으로부터 오는 긴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조형언어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그의 예술여정은 선화·(습작)유화시대(제1기: 1984〜2001)에서 발원되어, 선명한 색채의 화음으로 한국의 미를 독자적 화풍으로 표현하는 색면 추상시대(제2기: 2002〜2009)를 거쳐 우주의 원리와 운행질서를 표현하는 순수(절대) 추상을 중핵으로 하는 선(禪)예술시대(2010〜현재)를 전개하고 있다. 

 

▲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1) ‘선(禪)2010’ 석채·혼합재료. 130.3×162.2(가로×세로), 2010년 2) ‘선(禪)2016’ 캔버스에 아크릴. 72.6×90.8cm(가로×세로). 2016년 3) ‘선(禪)2016’ 캔버스에 아크릴. 27×160cm(가로×세로). 2016년 4) ‘선(禪)2016’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가로×세로). 2016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법관 화백의 (추상)예술세계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은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 ‘그림이 수행’이라는 철학 속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수행정진(作畵)하는 과정에서 전변을 거듭하여 급기야 우주의 본원에 육박하기 위한 무극(근원)의 예술세계를 향해 치닫고 있다. 이는 우주의 원리탐구와 운행질서를 밝혀내기 위한 의지의 발로로서, 근원(생명) 예술에 대한 갈망이자 몸부림이다.

 

법관 화백의 예술적 뿌리는 물론 구도(求道)의 선(禪)예술로서, ‘법(法)’을 ‘관(觀)하고’ 무의식을 추상예술로 시각화 한 것이다. 그의 예술이 수행 정진 과정에서 달마 등 선화로 시작되었으나, 오랜 성상 비바람을 맞아가며 수행 정진하는 과정에 나날이 전변하여 광휘(光輝)를 발휘하면서 우주의 본질을 향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의 선(禪)예술은 이미 종교(불교)적 차원의 의미를 넘어 우주의 본질을 노래하는 근원(根源)의 예술로 승화되어 가고 있다. 법관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그의 예술이 전하는 메시지 등을 살펴본다.

 

법관 예술이 색면 추상시대를 거쳐 순수(절대) 추상의 경지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점은 이미 수차 논급하였다. 모든 (추상)화가들에 공통된 사항이지만 (추상)작품들은 선·점·면을 기본소재로 하여 종국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점은 추상회화 조형의 기본(최소)단위로서, 여러 점들이 연속되어 선을 이루면서 면을 형성해 나가고 종국적으로 외형적인 형상이 창조되어 ‘예술’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법관예술 역시 이에 예외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다수의 작가들은 창조되는 형상 등을 생각하면서 드로잉(일명 ‘밑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법관 화백은 사물의 형체를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드로잉 과정을 생략한다. 특히, 근래의 순수추상 작업들은 생명체들이 살아 움직여 주길 간절히 염원하면서 캔버스 위에 수많은 점과 선들을 무의적으로 찍고 또 찍어나갈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처음의 점과 선들은 새로운 점과 선들에 의해 바탕으로 가라앉는다. 이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에 무언가 특정할 수도 없는 말로서 어찌 표현할 수도 없는 형언할 수 없는 형상들이 자연스럽게 탄생된다. 이것이 법 관 작화(作畵)의 통상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창작과정은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일 수밖에 없다. 이런 노작의 과정을 법관 화백은 수행(修行)이라 표현하면서 “창작이 수행이다”면서 미술과 수행의 일체(一體)론을 강조했다. 하루 평균 14〜15시간에 걸쳐 화면과의 피나는 싸움을 벌이는 창작수행을 하였으니, 미술창작이 수행이라는 작가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더하여 노고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 (왼쪽부터) 5)‘선(禪)2016’ 캔버스에 아크릴. 80×100cm(가로×세로). 2016년 6) ‘선(禪)2018’ 캔버스에 아크릴. 72×91cm(가로×세로). 2018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이렇게 탄생된 작품들은 구슬땀이 알알이 박혀있는 영혼의 결정체다. 이와 관련하여 법관 화백은, “예술의 세계는 스승도 제자도 없으며,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된다. 평가는 날카로운 관람자들의 몫”이라고 강조하면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수많은 관람객의 눈초리에 포위당할 것을 생각하여 땀을 흘리고 또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수행(노동)의 과정에 오브제(작품)들이 저절로 형상화 되었다. 그러므로 형상화 된 오브제들은 나의 또 다른 원형으로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생명력을 간직하면서 우주를 비행해 주길 바랄 뿐”이라고, 힘든 작업과정과 바램을 솔직 담백하게 전달했다.

 

점점 더 골 깊은 예술의 산속으로 들어가는 법관 화백은, “향후의 삶은 칼 날 위에서 춤을 춰야 하는 곡예사의 삶처럼 고달프고 험난할 것이 예상되나, 숙명이라면 어쩌겠나?”면서, 생의 종점까지 담담히 걸어갈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치열한 예술혼으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겨 예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길 염원

 

법관 화백의 예술여정 및 순수(절대) 추상미술 특성 등과 관련하여, 조명시리즈(1〜3) 등에서 “벽산을 향해 붉음을 토해내는 구도(求道)의 선(線)예술이자, 무심(無心)은 선(線)으로 스며들어가 선(禪)으로 탄생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열린 예술로서, 관람객들을 고요와 명상의 비행선에 태워 우주를 향해 운행하는 ‘신비와 명상의 예술’로 칭해도 부족함이 없겠다”고 평석(評釋, 평가·분석)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법관 화백의 선(禪)예술은 종교적 관점을 초월한 우주(삼라만상)의 원리를 밝혀가는 무극의 선(禪)예술로서, ‘예술은 감동’이라는 미의 진리를 향한 근원(根源)의 예술, 원상(原象)의 예술로 평석(評釋)함이 타당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법관 화백의 예술은 화엄(華嚴)의 예술로서 전입미답의 신천지 개척을 위해 우주를 비행하기 시작했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법관 화백의 순수 예술에 어떠한 카테고리도 설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 (왼쪽부터) 7)‘선(禪)2018’ 캔버스에 아크릴. 112×162cm(가로×세로). 2018년 8) ‘선(禪)2019’ 캔버스에 아크릴. 72×91cm(가로×세로). 2019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법관 화백의 주요 작품(그림1〜8)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한계상황 등으로 작품들의 구체적 특징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으나, 모두 심연의 늪에서 아련히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심금을 울리게 하면서 명상과 신비 및 운율과 시상이 절로 나오게 하고 있지 아니한가?

 

법관 화백은 승려 이전에 감수성을 잃지 않는 예술지상주의자다. 우리는 그의 작품들에서 잃어버린 감수성을 되살리면서 영감의 확충과 마음의 풍요(감동)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감동은 보는 이들의 심상과 사유, 또는 개개인의 추억이나 느낌에 따라 제 각각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열린 예술을 지향하는 그의 예술철학이다.

 

예술의 정의는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창조적 행위나 작품을 통칭한다. 예술의 기능은 표현을 통하여 인간의 감성이나 정서를 자극하면서, 인간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 감동이나 충격을 통해 새로운 정신 공간으로 끌어들이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법관 화백의 작품에서 인간들이 원초적으로 동경해 온 우주의 신비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퇴적된 기억 속에서 순수를 발견하면서 상처를 위무 받을 공감과 감동을 찾아 낼 수가 있다. 어쨌든 법관은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마음껏 향유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행위 하나하나는 평가받을만한 예술 그 자체다.

 

우주로의 여행을 위해 멈춰진 숨결 속에 껍질을 벗어던지고 속살마저 태우고 있는 영원한 예인(藝人) 법관 화백의 모습을 떠올리면 붓을 든 수월관음을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손놀림에 의해 찰나의 순간에 우주의 신비가 조형된다. 그의 붓은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사색의 일부이기도 하다.

 

법관 화백의 작품세계의 변용을 분석한 결과는 놀랍다. 달마 등 선화에서 시작된 작품들은 섬광처럼 스쳐가는 영감 속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색면 추상시대를 거처 순수추상시대를 개척하면서 우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예술의 원시림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그림(1〜8)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색면 추상주의의  열풍-변주를 거쳐 점차 절대화 되어가면서 근원의 예술을 갈망하는 원상(原象)의 예술로 치닫고 있다. 이는 영감과 의지의 결과다. 아니, 어쩌면 예지와 노력을 넘어선 운명의 필연적 흐름이라 볼 수도 있다. 

 

“마음 끝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 붓을 따라 반조하여 붉은 색조 한입 물고 솟구쳐 푸른 물속 거꾸로 치달으니 내 어리석음 그대로 드러나네... (‘선-2013’개인전 인사말)”란 선문답은 법관 화백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 하는 절대를 향한 바람의 역설적 표현이며, 느낌으로 시각화한 작품들은 또 다른 육필언어다.

 

더하여 “수행을 통해 얻은 마음의 평안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작품이 그러하겠지요”란 법관 화백의 무심(無心)한 고백은 작품이 전하고자하는 간결한 메시지다. 이렇듯 법관 화백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순결한 숨결과 같은 평화로운 안식(휴식)을 기대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면서 세파에 시달리는 아픔과 고됨 등을 위무해 주는 도피안처로서 말이다.

 

이렇듯 법관 화백 작품들의 또 다른 원형과 특장들은 순수함과 영원을 향한 귀소본능의 표창(表彰)으로서, 명상과 신비를 머금은 그의 작품들은 경계를 넘어 융합미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면서 영감의 꽃을 피워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법관 화백은 마침내 예술의 원시림 속으로 뛰어들어 우주를 향해 비행하기 시작해했다. 명상과 신비 및 시상과 운율을 머금고 있는 원상(原象)의 작품들은  광휘(光輝)를 발휘하면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화엄(華嚴)의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워 불후의 명작들을 남김으로서 예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길 염원한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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