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 느낌으로 충만한 화면

박영택 | 기사입력 2020/08/24 [08:41]

법관 - 느낌으로 충만한 화면

박영택 | 입력 : 2020/08/24 [08:41]

법관 - 느낌으로 충만한 화면 

 

회화를 무엇이라 정의하기는 어려운데 아마도 이는 화가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흔히 회화를 표면에 일루전(환영)을 주는 장치라고도 말한다.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은 평면이다. 그 납작한 피부, 평면 위에 시각적인 무엇인가를 남기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다. 평면성을 위반하지 않으려는 것이 추상이라면 애써 그 평면성의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무한한 재현의 논리, 기술을 구현 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여간 그림은 주어진 화면에 물감과 붓질을 통해 표면의 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형이상학회화를 주창했던 키리코는 위대한 회화란 화면의 질감이라며 그것을 이기는 미는 없다고 단언한바 있다. 그가 30대의 나이에 다시 발견한 티치아노의 그림을 본 후의 일이었다. 좋은 그림이 오직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회화는 일차적으로 주어진 화면의 질에 의해 판독되고 감상된다. 나는 그 작가만의 감각과 감수성, 기술로 이겨놓은 표면을 즐긴다. 그것이 구상이냐 추상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주제 또한 어느 면에서는 알리바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 왼쪽부터 1) ‘선(禪)2017’ 캔버스에 아크릴. 111.8×161.5cm(가로×세로). 2017년 / 2) ‘선(禪)2018’ 캔버스에 아크릴. 200×200cm(가로×세로). 2018년 / 3) ‘선(禪)2018’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가로×세로). 2018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법관 스님은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색을 칠하고 붓질을 긋고 점을 찍는 일을 반복한다. 물론 그러한 행위도 이미, 충분히 회화적 행위이겠지만 나로서는 그것을 우선하는, 가장 원초적인 모종의 행위, 갈망 같은 것으로 스님의 그림이 다가온다. 무엇인가를 그리기는 하겠지만 굳이 무엇을 그리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저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칠하기, 긋기, 찍기만으로도 충분한 포화상태를 보여준다. 이는 무수한 시간과 반복된 신체적 행위의 고임이고 축적이다. 그것을 통해 치성을 드리는 일, 온 마음과 몸을 다해 간절히 절하는 일, 그러한 반복된 행위의 결과와 동일하게 정성껏 그려서 이루고자 하는, 빛나는 화면의 질에 대한 문제인 듯싶다. 궁극적으로 스님이 도달하고자 했던 어떤 깊음을, 차마 시각화시키기 어려웠던 그 모든 것들을, 그동안 접했던 탁월한 예술작품들에서 받은 인상들을, 자신의 모든 느낌을 시각화해주는, 드러내주는 그런 표면을 만들려는 지난한 노력이 스님의 그림이 아닐까? 하긴 모든 그림은 결국 그러한 경지를 궁극의 목표로 삼을 것이다. 

 

스님의 근작은 구체적인 형상이나 모종의 이미지를 연상시켜주는 요소를 모두 지운, 추상회화다.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구체적 이미지가 없다. 물론 색상과 선으로만 가득한 화면에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연상하려면 얼마든지 연상할 수는 있다. 최소한 화면 안에 그러한 요소가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을 우리는 추상이라고 부른다. 동시에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을 질문하는 차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스님wlrdudxor은 평면을 인식하면서 일루전을 배제한다. 그래서 그림은 납작하다. 그러나 선이 올라가고 색채가 칠해지고 그로인해 바탕 면(흰색)이 슬쩍슬쩍 드러나면서 화면은 미묘한 층을 이루고 깊이를 만들고 공기가 넘나드는 통로를 만들어준다. 선들이 만들어 놓은 자취를 쫓다가도 그 사이에 남겨진 여백/틈으로 시선이 빠지기도 한다. 몇 겹의 층을 만들어놓은 화면은 결코 납작한, 즉물적 표면이 아니다. 생성적이고 활력적인 화면, 더없이 고요하면서도 미묘한 파동에 의해 예민해진 화면, 감각적인 선과 단속적인 붓질이 남긴 매력적인 화면이다. 

 

스님의 그림은 애써 무엇을 그리기보다 인간의 삶과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며 환영을 배제한 소박한 화포에 그저 물감을 스며들게 하고 칠했을 뿐이다. 정의할 수 없고 규명할 수 없고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으며 자연과 같은 세계를 그리고자 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스님의 그림은 모두 일루전과 작위적 형태나 표현적인 제스처를 부정하는 추상, 이른바 탈형태 추상회화이자 동시에 캔버스 천과 물감, 붓만으로 이루어진 자족적인 회화가 되었다. 무엇을 만들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닌 형태가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이 자연주의적 특성 다분히 무작위적인 측면은 한국추상미술을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수사다. 

 

▲ 4) ‘선(禪)2020’ 캔버스에 아크릴. 194×90cm(가로×세로). 2020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색채는 단색조다. 대부분 청색이다. 그러나 단일한 색상이 아니라 청색 안에서도 섬세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몇 개의 색채가 섞여서 호흡하고 있고 물감의 탄성 또한 다르다. 어느 작품은 수채화처럼 농담의 효과에 의해 번지고 퍼지는 습성이 강하다. 린넨 천을 적셔 들어가는 농담의 맛이 있고 또 다른 작품은 찰진 물감의 물성이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표면을 균질한 질감과 톤으로 성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부는 단일하지 않아 다양한 색채, 다양한 표정의 선들이 쌓여있는가 하면 물감의 농도에 따른 다채로운 변화를 주기도 하고 선의 굵기와 방향의 차이가 발생하는 장소가 된다.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단순한 구성 안에 복잡하고 다양한 것들을 껴안고 있으며 개별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적막하고 평화롭다고 할까, 고요하고 깊은 그런 상황을 암시하는 형국으로 연출되어 있다. 그림은 무엇을 지시한다기보다 모종의 느낌, 감각을 발생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보이는 것 이면의 세계이자 오로지 느낌으로만 가능한 세계이며 문자나 논리로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래서 스님은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법관 스님이 그림을 통해 전하려는 바가 이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그림은 결국 수행하는 스님의 일상, 삶과 분리되어 다가오지 않는다. 주문이나 명상과 진배없는 그런 그림그리기 말이다. 나아가 지극 정성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공력으로 이루어진 그런 그림이 그것자체로 충분한 회화임을 보여준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루이비통, 유니세프와 파트너십으로 5년간 145억원 모금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