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운당 박종용화백의 추상회화, 그 작품세계

-‘결’시리즈 중 단색추상화를 중점으로-

박준아 | 기사입력 2020/08/31 [10:17]

화운당 박종용화백의 추상회화, 그 작품세계

-‘결’시리즈 중 단색추상화를 중점으로-

박준아 | 입력 : 2020/08/31 [10:17]

-‘결’시리즈 중 단색추상화를 중점으로-

 

박종용화백의 이력은 흥미롭다. 인터넷상에서 그의 전기적인 스토리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공신화의 전형적인 그의 이야기는 사실, 몰랐던 당시 미술판의 단편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박종용화백의 이력의 흥미로운 점은, 이미 장인으로 인정받는 중견 화백임과 동시에 서양미술분야에 있어선 최근에 주목받는 루키라는 점이다.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모든 미술분야에서 활동을 했었지만 모두 대상의 재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간 주목 받은 작품들은 주로 전통적인 동양화(산수화와 호랑이 그림<그림1> 등)이었다. 

 

▲ <그림1 >박종용화백의 대표작 맹호도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박종용화백이 추상화를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부터 였다. 그 무렵을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어려웠던 시절 생계유지들을 위해 창작했던 작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상황에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번민 속에 살아 숨 쉬는 예술을 갈구하면서 새로운 추상예술의 창작을 결심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그가 작품의 실체적 존재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가 찾은 답이 “추상예술의 창작”이었음을 미루어보아  그가 ‘재현의 한계에 봉착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울러 밤하늘의 별을 보다 계시처럼 그에게 왔다는 추상의 영감이 형이상학적인 영적 에너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인다. 

 

이후 갖은 시행착오 끝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작품들은 2018년 즈음의 작품부터다. 역사가 시작된 이례로 연거푸 반복되는 형식적 파괴와 복원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로 발생 했듯 박종용화백 개인 안에서도 사조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 경계가 고스란히 개인의 역사에 녹아있는 만큼 그의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당시의 작품세계의 맥락을 같이 하게 된다. 박종용 화백의 추상회화는 재현의 한계에 부딪혀 발생된 anti-modernism의 맥락으로, 정확히는 ‘비구상 회화’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신사실파의 이념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구체미술’(프랑스의 ‘추상-창조’그룹이 주창한 조형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자연의 형태나 감각, 감성주의에서 완전히 떠난 비재현적이고 객관적인 회화)이 내세운 ‘비구상 회화’는 자연의 흔적이 사라진 화면과 회화의 내적인 원리만으로 생성되는 순수한 시각적 효과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추상의 대안적 용어로 통용된 기존의 ‘비대상’이나 ‘구체’와 내용상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입체주의와 구축주의, 바우하우스, 데 스틸 등에서 파생된 추상미술에 관한 다양한 미학적 이론과 실행을 통합하는데 효용성을 갖는다. 추상-창조 그룹은 자연형태의 점진적 추상화(Abstraction)와 자연과 관련 없는 전적인 창조(Creation)라는 두가지 조형원리를 통해 비구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이러한 추상화의 두가지 관점의 조형원리는 자연형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라도 이를 비구상미술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근원적 형태의 출발점인 “점으로 평면안에서의 움직임을 위해 원형 구조를 고안”했다는 박종용화백의 추상회와의 조형언어는 추상(Abstraction아프스트락시옹)-창조(Creation크레아시옹)중 크레아시옹에 해당하게 된다. 

 

박종용화백의 단색추상의 작품을 보면 한국의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단색화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그들 또한 당시 1940년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추상-창조’그룹의 영향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당시 일본신흥미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실파 작가들은 당시 서구미술 문맥에서 이탈하여 자기화한 형태의 미술을 지향하여 자율적인 형식주의를 수용하고 서구 기하 추상과 차이점을 만들어내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박종용화백과 신사실파의 단색추상화사이에는 존재의 실체를 좇아, 담고자 하는 이념이 공통으로 담겨있다. 그러나 동시에 신사실파가 서구미술과의 차이를 두며 자기화 했 듯 박종용화백 또한 전통적 표현양식안에서 현대적 감성을 채운다. 그것이 2020의 우리가 그의 작품안에서 신사실파 그림과 차별화를 두면서도 공감하는 이유다. 

   

2.

비구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직접적인 심상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미술, 즉 추상미술의 다양한 제 경향을 포용하기 위한 용어 ‘레알리테 누벨(Realites Nouvelles)’ 의 맥락으로도 박종용화백의 작품들은 설명된다. 1939년 파리의 ‘갤러리 샤르팡티에’(Galerie Charpentier)에서 열린 동명으로 전시가 열리기도 했던 ‘레알리테 누벨’은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용어를 차용했다. 새로운 사실주의로 번역되는 ‘레알리테 누벨’은 아폴리네르가 1912년에 사물의 외관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 즉 추상미술을 정의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이다. 

 

추상경향의 작가들 사이에서 통용되기도 한 이 용어는 대표적인 예로 말레비치가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에서 절대주의로, 새로운 회화적 사실주의(From Cubism and Futurism to Superematism: The New Painterly Realism)]라는 글에서 내세운 “새로운 회화적 사실주의”를 들 수 있다. 말레비치는 이를 통해 “비대상적 창조(Non-Objective Creation)”를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절대주의, 즉 직관적 이성을 통해 자연에서 기원하지 않은 형태를 창조함을 의미했다. 

 

말레비치 또한 처음엔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전통적 회화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대상적 창조’에 한계를 느끼고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받아 ‘대상에 갇힌 회화의 한계’ 로부터 벗어나고자 추상화에 몰두했다. 이는 박종용화백과 말레비치 모두 같은 계기로 추상화로 작품 양식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작품의 내용과 양식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을 갖게 된다. 또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작품과 박종용화백의 추상화 모두 ‘크레아시옹’적인 추상작품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관련기사] 화운당 박종용 화백, 신화적 스토리를 넘어 본질을 찾는 장인의 구도적 작품세계

 

박종용화백은 자연의 ‘결’에 대한 물성을 재료에도 고스란히 담아낸다. 마대에 흙을 곱게 걸러 아교와 섞어 캔버스 위에 씌운 마대 위에 점을 찍어 화면을 채워나간다. 기성품으로 만들어 져있는 물감이 아닌 손수 손으로 흙을 개어 만든 재료는 자연스러운 점들마다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또한 일률적인 점의 배열 안에서 평면적인 넓이의 차이가 아닌 3차원적인 깊이가 다른 운율을 만들며 운동한다. 일정한 점을 찍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상태의 흙의 점도나 아교와의 혼합율을 조절해야 하고 그에 따른 붓터치 또한 정교해야 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결’의 철학을 담기 위해 박종용화백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고, 자연스럽게 화면을 표현 한다. 그 결과 젊은 시절 단청과 불화를 그리며 익힌 경험을 녹여낸 재료의 사용은 그의 역사와 철학 모두를 담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 <그림2>박종용, 무제(결), 캔버스에 고령토, 1455 x 970,2018  ©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그림2>는 흰색화면으로만 이루어진 ‘무제(결)’시리즈의 단색화 중 하나다. 박종용 화백은 인터뷰에서 “평면 안에서의 움직임을 위해 점으로 원형의 구조를 고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시작인 ‘점’으로 배열과 구성으로서 ‘운동감’을 만들어 낸다. 그의 화면 안의 리듬과 운율은 곧 시이고 음악이며 시간의 개념이 내포됨을 보여준다. 작가의 의도대로 물리적인 개념으로는 시간과 공간, 우주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맞물리는 형이상적 정신적 에너지와 자연과의 합일 등을 작품 안에 녹여낸다. 다시 말해, 그가 행해짐으로서 발현되는 정신적 에너지가 형태로서 운동감으로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며 각각의 개념들을 관통함과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다. 

 

3.

나는 작가 개인 안에서 일어난 작품 형식의 전환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미술사조의 흐름과 함께 보았다. 그러나 현재 2020년 100년 전 일어난 20세기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이 약동하던 때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의 열쇠를 저명이론가인 할 포스터의 [Re : Post]에서 찾았다. 

 

그는 먼저 모더니즘 예술의 이데올로기를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마이클 프리드의 비평에서 비롯하여 ‘순수성’이라고 규정지었다. “예술의 개념은(…) 개별 예술 내에서만, 완전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예술 작품 자체는(은유적으로) 그 지시물을 대신할 수 있다. 따라서 회화, 조각, 건축이 서로 구분되고 예술은 철저히 그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각각의 예술은 하나의 코드 혹은 성격을 가지며, 그 코드가 드러나고 그 자체와 관계없는 것이 본성에서 제거될 때 진보한다는 것이다.

 

‘순수성’이란 용어에 집약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하고 축소하여 예술가의 진정한 역사는 별개의 것, 비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돌이켜 보면 이런 전략은 예술을 신성시 하는 것이고 전략적인 후퇴로 보인다. ‘순수성’은 오히려 아카데미의 특별한 직업주의와 상업적 상품화시켰기 때문이다. 또 ‘순수성’은 특별한 역사에서 생겨난, 그 자체의 문제로서의 미술이라는 관념도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미술사가 제도적으로 제시되는 방식이다. 즉 영향 관계와 지속성이라는 역사주의의 관점때문에 시간의 전후 관계를 인과관계와 혼동하기 쉬운 경향에서 본 작품의 계보, 미술가들의 계보로서의 미술사이다.

 

레나토 포졸리(Renato Poggioli)가 [아방가르드의 이론The Theory of the Avant-Garde]에서 “초월적 역사주의(transcendental historicism)의 미술적 등가물” 이라 정의한, 전위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여기서 ‘초월적 역사주의’란 용어가 모순된 것 같지만, 그것은 모더니즘의 한 토대이다. 아무리 ‘초월적’인 혹은 급진적인 새로운 미술이라도 대개는 역사주의에 의해 다시 나타나고 친숙하게 된다. 후기모더니즘은 그 모순을 재가공한 것에 불과하다. 미술은 역사주의의 극단에 섰을 때 전위적이다. 미술가는 미술사의 규범들과 단절하기 위해 그것들을 찾아낸다. 이런 역사주의(그 자체의 전통으로서의 새로움)는 전위의 근본인 동시에 그 목적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표 중 하나는 역사주의를 벗어난 급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담론인 역사주의는 본질상 스스로를 보충하기 때문이다. 

 

사실 박종용 화백의 추상회화를 그 자신 안에서의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되는 형식적 변화에 주목하였지만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작품세계는 회화의 전통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이념과 더욱 가깝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현재 시대상을 우리는 뭐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동시대성과 다양성, 노마디즘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은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요동치고 있다. 작가들은 위에서도 언급한 “역사주의의 극단에 섰을 때 전위적이다.”란 말처럼 끊임없이 숙명적으로 전위를 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양태는 안티테제와 복원으로서 나타난다. 그런 의미로 그의 단색의 추상회화는 새로운 전위로서 21세기의 대표적인 양식인 뉴미디어, 극사실주의, 슈퍼플랫등과 비교했을 때 또다른 안티테제로, 혹은 전통적 모더니즘 이념을 다시 복원해낸 측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신사실파의 작가이기도 한 김환기 화백의 [추상주의 소론]에서 밝힌 전위미술의 개념을 남기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현대미술의 한계에서만 전위회화가 존재한 게 아니라 일찍이 그 시대 시대에 있어 이미 전위적 회화가 있었고 그러기 때문에 회화예술은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또 내일로 진전(進展)한다. 인간의 순정(純正)한 창조란 그 시대의 전위가 될 것이고 진보란 전위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미술사는 항상 새로운 백지 위에 새로운 기록을 작성해간다.”

 

우리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든 형식의 작품이 전시되고 평가되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상에서 고전적으로 보이는 장인의 구도적 성격을 띄는 그의 작품들이 다시금 주목되고 있으며, 주목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0. 08. 31. 미술평론가 박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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