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통해 되돌아보는 박종용 화백의 발자취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20/09/28 [22:26]

작품을 통해 되돌아보는 박종용 화백의 발자취

최병국 기자 | 입력 : 2020/09/28 [22:26]

화운당 박종용 화백은 8살 때부터 스케치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60년 세월동안 일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는 天成(천성)의 작가다. 고향시절부터 시작된 60년 예술인생은 인사동·용인·천안시절을 거치면서 만화, 극장 간판, 각종 민화, 화조도, 인물(초상·인물)화, 정물화, 산수화, 영모화(호랑이), 불화 등의 각종 평면예술을 넘어 도예 및 조각 등, 전 방위적으로 전개되면서 각 장르의 작품들을 다재다능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전천후 작가로 변모했다. 

 

뿐만 아니라 필연적 운명에 따라 10여년에 걸쳐 구슬땀을 흘려가며 영원을 갈구하는 추상표현주의 작품(결)들을 탄생시켜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의 하늘길을 개척하고 있다. 풍상의 60년 예술인생은 고비마다 변천하면서 작품의 완숙도를 더해가면서 인생을 전변시켰다. 작품들을 통해 박종용 화백의 세월의 흔적들을 되돌아본다.

 

그림1) 묵란도 재료 화선지에 먹 크기 각 70×130cm(가로×세로) 1968년
그림2) 장수와 선녀 재료 비단에 채색(당채) 크기 35×130cm(가로×세로) 1970년
그림3) 광부의 초상 재료 도화지에 목탄 크기 30×30cm(가로×세로) 1976년
그림4) 불화 재료 실크에 옻칠·금분(순금) 크기 70×130cm(가로×세로) 연도 1978년  © 문화저널21

 

1968년 작 묵란도(현존하는 最古 작품)

8살 때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종용은 12살 때 화투그림으로 ‘그림신동’이란 칭송을 받아 화가를 결심하면서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당시의 작품들은 남아있지 않고 그림1)의 묵란도가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그림은 16살 때 마산 하숙집에서 그렸으며, 화선지에 먹으로 난을 그린 묵란도다. 16살 때 일필휘지로 난을 쳐내는 놀라운 기교를 보여주는 천부적 재능을 표출하는 작품이다.

 

장수와 선녀(1970년 작. 상상祈願畵)

1969년(17세) 상경한 박종용 화백은 고려민예사 소속 화가로 취업하여 인사동에 화실을 마련하여 만화, 극장 간판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특히 단원 김홍도 등 조선 대가들의 원작재현 등을 하면서 내공(필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림2)의 장수와 선녀는 재현그림이 아니라 지상의 장수가 하늘의 선녀에게 소원을 기원하는 일종의 상상 祈願畵다. 뛰어난 필력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광부의 초상(1976년 작 목탄화. 자신의 암울한 장래를 그린 상상 초상화)

이 그림을 그린 시기 및 장소는 1976년 여름 맹호부대의 군 상황실이다. 당시 교사였던 아버지가 1975년 타계했다. 제대 후 어미니 및 6형제자매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너무 암담하여 도화지에 목탄으로 광부의 초상화 그림3)을 그렸으나, 실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장래의 암울한 자신의 초상을 상상하여 그렸다고 한다. 얼굴 윤곽선이 박 화백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군 근무 중(1974〜19677) 남한산성, 전투 그림들이나 군 간부의 얼굴 등.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다고 한다.

 

불화(1978년 작. 현존하는 박종용 最古의 불화작품)

박종용은 1969년 인사동 활동을 시작하면서 조계사 맞은편에 화실을 마련하여 수시로 조계사에 들락거리면서 단청에 매료되어 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독자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사찰벽면의 각종 불화 등을 나눠 그리는 (하)도급 형태였다. 그림4)의 불화작품은 제대 후인 1978년 인사동 화실에서 그린 실크에 옻칠 및 금분(순금)을 입힌 작품으로서, 고유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박종용 불화의 효시격인 작품이다.

 

그림5) 불상 石조각(일명 ‘동자상’) 재료 자연석 크기 28×45×15cm(가로×세로×폭) 1979〜1980년
그림6) 등잔대 재료 괴목·니스. 크기 30×75×21cm(가로×세로×폭) 1979년  © 문화저널21

 

불상 石조각(일명‘동자승’) (1979〜1980년 작. 박종용 ‘조각예술의 始原’) 

그림5)의 1979년 작 불상 石조각(일명 ‘동자승’)은 박종용 화백이 1979년 용인으로 아틀리에를 옮긴 직후 조각 창작을 본격 구상하면서 외가인 경북 고령의 냇가에서 주은 돌을 고령 이모 집으로 옮겨 1년에 걸쳐 끌 등을 이용하여 힘들게 창작한 박종용 조각예술의 始原(시원)적 작품으로서, 구도 및 비례의 완벽성과 균제의 미가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표현된 걸작이다. 작가는 연잎 받침대 위에 앉자 명상하는 동자승을 생각하면서 조각을 창작했으나, 佛畵集 등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담아냈다. 1년에 걸쳐 무쇠와 같은 돌을 파내는 과정에서 조각적 재능이 여지없이 표출되었다.

 

등잔대(공예조각). (1979년 작. 박종용 민예조각예술의 始原’. 절세의 작품)

그림6)의 1979년 작 괴목 등잔대(공예조각)는 박종용 화백이 1979년 용인으로 아틀리에를 옮긴 직후 시작한 (조각)작품으로서 5〜6 걸쳐 개월에 매우 힘들게 완성한 작품으로서 그림5)의 불상 石(석)조각과 함께 하면서 박종용 조각예술의 시원적 작품이다. 여러 치수의 끌을 사용하여 5〜6개월에 걸쳐 섬세한 거북받침대의 특이한 연잎 등잔대를 조각했다. 특히 기존 등잔대에서 볼 수 없는 자유자재로 돌릴 수 있는 불교를 상징하는 연잎 문양의 바람막이까지 조각했다. 등잔대는 조선조 각종 등잔대를 뛰어넘는 보물급 수준의 절세의 작품이다.

 

그림7) 백동자도 재료 화선지에 당채 크기 35×130cm(가로×세로) 1980년대 초반
그림8) 도자기(항아리) 재료 고령토·백토 크기 각 35×118cm(가로×세로) 1980년대 초반
그림9) 호랑이 (88서울올림픽 출품작) 재료 순지에 채색(동양화물감) 크기 130×70cm(가로×세로×) 1988년 
© 문화저널21

 

백동자도. (1980년대 초반. 경지에 오른 민화예술)

부귀한 저택의 정원 등을 배경으로 어린 동자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어울려 놀고 있는 모습을 8폭이나 10폭의 병풍에 담은 그림을 ‘백동자도(百童子圖)’라고 하며, 주로 사내아이 출산을 기원하는 뜻에서 결혼식에 사용됐다. 그림7)의 8폭 병풍용 백동자도는 본격 민화예술을 펼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제작된 민화예술 절정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백동자들이 정원과 냇가, 매화나무 위, 마당, 정자 아래 계단과 연못가 등지에서 웃음꽃을 피우면서 놀이하는 모습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걸작이다.

 

도예작품(항아리). (1980년대 초반 도예 대표작)

그림8)의 도예작품은 1979년 용인으로 아틀리에를 옮긴 직후 시작한 도예작품으로 1980년 연말경 경기이천의  대광요에서 직접 물레를 돌려 제작한 작품으로 기억한다. 1977년 8월 제대 후 가족 및 형제자매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이천의 도자 가마에서 많은 도예(작품자기 및 생활자기)를 제작하였는데, 작품8)의 도자기(항아리)작품은 대표작의 하나이다. 당시 작품 및 생활자기 등을 직접 물레를 돌리거나 조각도 등으로 파내면서 다채로운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일부는 일본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도예작품은 1985년경까지 지속됐다.

 

호랑이 그림 (1988년 작. 서울올림픽 출품작)

박종용 화백은 1986년 여름 용인에버랜드 동물농원에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에 충격을 받아 몇 시간에 걸쳐 호랑이 모습을 스케치 했다. 민화 까치호랑이를 넘어선 실물호랑이 그림의 시작이었다. 특히, 1988 서울올림픽에서 호랑이가 마스코트(일명 ‘88올림픽 호돌이’)가 됨으로서 각종 생활용품에까지 호랑이 특수 붐이 일어났다. 그림9)의 호랑이 그림은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 출품한 특별한 작품이다. 호랑이 그림은 박종용 예술의 최고봉이자 트레이드마트이기도 하다. 최고 기량의 호랑이 그림으로 廣大無邊한 예술적 경지를 개척했고, 미술시장에 호랑이 그림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림10) 무제(결) [습작(실패작)] 재료 마대·흙·아크릴·파이프. 크기 130×162cm(가로×세로) 2004년
그림11) 무제(결) 재료 마대 ·흙·아교. 크기 130×162cm(가로×세로) 2018년
그림12) 무제(결) 재료 마대 ·흙·아교·석채 크기 130×162cm(가로×세로) 2019년  © 문화저널21

 

‘결’의 창작 및 초기 실패작(2004년 말 천안아틀리에서의 창작한 습작)

용인·천안시대를 거치면서 상업화가에 대한 번민이 커져가면서 우주의 근본원리와 미의 진리를 화폭에 담아내는 추상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것을 결심하면서, 2004년 겨울 천안아틀리에에서 처음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창작했으나 실패작이었다. 전천후 예술사를 자부하던 작가로선 충격적 사태였다. 그림10)의 작품은 그때(2004년 말) 창작된 습작(실패작)이다. 이런 실패과정을 거쳐 2006년 여름부터 설악산아틀리에서 본격적으로 추상작품 창작에 몰입한다.

 

‘결’의 탄생(2018년 작. 무한을 향해 세포분열을 연상케 하는 대표작)

영원한 생명예술을 갈망하는 추상회화작업이 초기 차디찬 실패로 돌아감아 따라 예술의 용광로에 스스로를 던져 10여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엄혹한 수행과 치열한 노동을 거듭한 끝에 2015년 겨울경부터 명상과 신비를 머금은 심도 있는 작품들이 탄생되기 시작했다. 그림11)의 작품은 2018년 탄생한 대표작품이다. 우주를 향하여 성장하는 생명의 율동을 느끼게 하면서 무한을 향해 응집과 확산을 되풀이하는 세포분열을 연상케 하고 있는 명작이다.

 

‘생명·조화·선율의 판타지아’가 울려 퍼지는 신비스런 작품(비상을 꿈꾸다)

‘미와 우주의 원리 표현’ ‘무한의 기원’ ‘생명의 율동’ ‘생명·조화·선율의 판타지아’가 울려 퍼지는 신비스런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경계를 넘어 융합미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할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작품 자체에 내재해 있는 명상과 신비 및 시상과 운율의 發顯(발현) 등으로 융합미학으로의 개화는 필연적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2019년 작 그림12)는 말로서 어찌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과 빗물 같은 영감이 흘러넘치고 있다. 비상을 꿈꾸는 명작이다.

 

▲ 그림13) 무제(자연과 문명) 재료 철판·돌 크기 150×300cm(가로×세로) 2018년  © 문화저널21

 

자연과 생명의 빛을 향한 조형예술은 ‘결’의 또 다른 입체적 표현방식이다.

문명(철판)과 자연(돌)의 만남을 상징하는 이미지 13)의 조각 작품은 박종용 예술이 나아갈 방향을 함축적으로 예시해주고 있는 ‘결’의 또 다른 표현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작가는 ‘결’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종합예술로서 우주만물의 근원인 ‘결’에서 발원되어지는 자연과 문명의 상징적 만남으로 자연과 생명의 빛을 지향하는 또 다른 ‘결’을 입체화 하였다고 설명했다. 더하여 향후 평면회화 속의 ‘결’을 입체화시켜 ‘결’의 종합예술을 완결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박종용 화백은 세계로 비상하는 꿈을 꾸면서 ‘결’의 ‘열풍-변주’와 ‘무한질주’을 향해 ‘화운당아틀리에’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의 몸속에는 무궁한 예술의 광맥이 잠재되어 있으며, 쉼 없이 분출되고 있다. 향후의 작품 창작 등과 관련하여 박종용 화백은, “결의 평면회화를 기본 축으로 하되, 자연과 문명의 만남이란 도식적 입체작품을 넘어 온갖 결의 형상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여 평면과 입체가 동일체를 이루는 성성(成相)의 예술을 구현해 내겠다”면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기대되는 상황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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