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부와 문화 꽃피웠던 동서 문명의 교차로이자 접점

소련의 침공과 탈레반 등장으로 많은 유적 훼손…2001년 바미얀 석불 2점 폭파

김동건 | 기사입력 2021/08/31 [18:35]

아프가니스탄, 부와 문화 꽃피웠던 동서 문명의 교차로이자 접점

소련의 침공과 탈레반 등장으로 많은 유적 훼손…2001년 바미얀 석불 2점 폭파

김동건 | 입력 : 2021/08/31 [18:35]

소련의 침공과 탈레반 등장으로 많은 유적 훼손…2001년 바미얀 석불 2점 폭파

 

“물자가 오가고 부(富)가 쌓이는 곳에 문화도 꽃핀다.”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고대 박트리아(Bactria)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해당한다. 박트리아는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중앙에 위치해 수천 년 전부터 교역이 활발했다. 이곳은 질 좋은 청금석(靑金石) 생산지로 유명해 ‘靑金石의 길(lapis lazuli road)'이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부(富)는 자연 문화를 낳는다. 즉 경제와 문화는 인과관계다. 지리적 특성상 동서 문화가 융합되고 토착 유목문화까지 뒤섞여 아프가니스탄 박트리아 문화를 꽃피웠다. 박트리아는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일부이다. 이곳은 BC 600년경~AD 600년경에 동서양간의 육로 통상뿐만 아니라 종교와 예술이 교류하는 교차점으로 큰 역할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우리에게 얼마나 친숙했을까? 이 두 사람 때문에(?) 가는 길도 멀다. 서울에서 두바이나 이슬라마바드, 델리를 거쳐 비행기를 갈아타고 들어가야 한다. 옛날 아프가니스탄은 평범한 통과점이 아니라 사방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아놀드 토인비(영국 역사학자)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반부를 지나는 길의 절반은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만나고 나머지 절반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베그람에서 만난다고 했다. 즉 서쪽에서 오는 길, 동쪽에서 오는 길, 또 남북을 연결하는 길이 모두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났던 것이다. 토인비는 지리적 위치에 따른 문명사를 ‘막다른 골목(cul-de-sac)' 과 ‘라운더바우트(roundabout)’로 나누었다. ‘막다른 골목’은 문명의 흐름이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나아가지 못한 곳이다. 일본과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대표적이다. ‘라운더바우트’는 유럽풍의 방사상(放射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방에서 오는 길이 한 점에 모였다가 다시 퍼져나가는 원형의 로터리를 말한다. 현재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이다. 

 

▲ 2016년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명전(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아프가니스탄 유물 ▲(위) 문명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태양과 초승달 ▲(아래 왼족부터) 남녀를 상징하는 ‘비너스상’ 과 ‘헤라클레스상', 군주로 보이는 사람이 비취가 박힌 황금 양쪽에 용(龍)을 움켜쥔 모습의 장식물.


‘라운더바우트’ 아프가니스탄은 야심찬 정복자, 큰돈을 벌려는 상인, 막중한 외교 임무를 띤 사신, 자신의 정치 이상을 구현하려는 경세가, 새로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려는 순례자, 솜씨를 과시하려는 예술가·장인(匠人)등이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의 잦은 왕래는 이곳의 경제를 일구었고 풍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중에서 ‘마음의 정복’을 꿈꾸는 순례자, 중국의 현장(玄獎) 신라의 혜초(慧超)등도 인도에 드나들 때 이 길을 이용했다.

 

역사학자 아널드 플레처는 아프가니스탄을 ‘정복자의 대로(大路, Highway of Conquest)' 라 불렀으니 정복자가 그냥 지나치는 길이 아닌 ‘문명이 오가는 대로(大路, Highway of Civilizations)' 였다. 즉 아프가니스탄은 동양과 서양의 접점에 위치한 문명의 교차로였다. 서쪽의 이란에서 들어와 동쪽의 인도로 항하고 또 그 반대방향의 길은 유라시아 동서교통의 혈맥과 같았다. 인도로 들어가는 입구였으며 반대방향으로는 이란으로 들어가는 입구였으니 동서가 만난 곳이다. 

 

BC 4세기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동으로 원정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많은 그리스인 도시를 세웠다.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적으로 불교가 융성했으나 7세기 중반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이 진출하면서 10세기부터는 이슬람화되면서 지금까지 이슬람 국가로 남았다.

 

아프가니스탄은 산간의 작은 나라가 아니다. 면적이 65만km(제곱)으로 한반도의 세 배다. 인구도 20여 년간의 전쟁으로 줄어들었지만 2,800만명(2003년 기준)이다. 내륙에 위치하여 국경선도 5,500km에 달한다. 동쪽과 남쪽으로 파키스탄, 서쪽으로 이란, 북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접하고 있다. 동쪽 끝에 ‘와한 회랑(Wakhan Corridor)'은 중국과 연결돼 있다. 또 와한 회랑의 북쪽은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과 맞닿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민족 국가로 인구 절반은 파슈툰족(48%)이고 타지크족(25%) 하자라족(10%) 우즈베크족(8%)으로 구성돼 있다.

 

고의 또는 무지로 문화유적을 훼손 또는 파괴하는 것을 ‘반달리즘(Vandalism)'이라 한다. 오늘 날 아프가니스탄은 ‘반달리즘’의 대표적 지역이다. 1978년 공산혁명과 이듬 해 소련의 침공과 탈레반 등장으로 많은 유적이 훼손됐다. 아프가니스탄의 국립박물관(카불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의 70%가 1990년 중반에 사라졌다. 2001년에는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뮬라 무하마드 오마르가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상(像)과 非이슬람 종교물을 파괴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탈레반 관료가 박물관에 들이닥쳐 진열장을 망치로 부수고 조각상들을 파괴했다. 가장 큰 사건이 2001년 3월에 바미얀 석불 2점(각각 36mㆍ55m)을 폭파한 일이다. 

 

바미얀 석불은 그리스 조형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초기 양식의 전형을 간직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는 당시 인도를 지배한 마우리아 왕조에게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이 동방세계에 미친 대표적 영향으로 불상의 출현을 들수 있다. 석가모니 사망부터 500년간의 무불상 시대를 깨고 AD 1세기에 불상이 출현한다. 바미얀 석불이 AD2~3세기니 초기 불상의 양식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간다라 미술 전문가인 이주형(서울대) 교수는 경주 석굴암이 바미얀 석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공통적으로 원형 평면 위 배치와 돔형 천장을 이유로 든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전실과 안쪽 벽에 부조로 새긴 상과 위쪽에 감실(龕室)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이 있는 점 등이 똑같다는 것이다. 

 

이들이 문화재를 약탈하는 목적은 재원 조달에 있다. 문화재 파괴가 계획적이고 그 판매가 주요한 수입원이다. IS 조직 내 ‘귀중한 자원 섹션’이라는 부서가 있는데, 이들의 임무는 유적지를 파헤쳐 도굴하고 반출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인터넷에 올려 팔기도 한다. 

 

과거 서역(西域)에는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 도시(오아시스)국가들이 대상(隊商) 왕래로 번성했다. 이중에서 사막 북쪽에 오늘날의 위구르자치구인 쿠차국(龜玆:구자)이 있었는데 ‘북위서(北魏書)ㆍ서역전(西域傳)’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일반적으로 음란함이 심해 여시(女市)를 두고 남자의 돈을 모아 관료에게 바친다.”

 

여기서 ‘女市’란 다름 아닌 유곽(遊廓)이다. 서역의 오아시스 도시에 먼 길 오가는 대상(隊商)을 상대로 받은 화대(花代)가 세금으로 정부의 수입이 됐다는 얘기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문화재 약탈로 정부의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니 과거 쿠차국의 매춘 수입보다 더 나쁘지 않은가?

 

현재 지구촌은 장기간 코로나와 사투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철수에 따른 탈레반의 폭정을 지켜보고 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소식은 우려가 현실이 되면서 앞으로의 향방도 그리 밝지 않다.

 

필자는 2016년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명전(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다. 솔직히 아프가니스탄의 이미지가 별로 안 좋아서 큰 기대는 안했는데 유물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이곳의 역사 지리적 문화적 가치를 알게 됐고 그 감동을 사진 몇 장으로 남겼다. 유물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남녀를 상징하는 ‘비너스상’ 과 ‘헤라클레스상’이며 장식물중에서 군주로 보이는 사람이 비취가 박힌 황금 양쪽에 용(龍)을 움켜쥔 모습이다. 비취는 서양, 용은 동양의 상징물이니 이곳이 동서양의 접점이었음을 유물이 말해준다. 또한 수레를 탄 장면에서 태양과 초승달이 등장한 것도 문명의 다양성이다. 오늘 날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보면서 6년 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작성해 보았다. 

 

※필자 주 : 아프가니스탄 문명사 부분은 이주형(서울대 고고미술학) 교수 논문, 문화재 파괴는 김영나(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칼럼, 중앙아시아 역사는 민병훈(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 부장) 논고를 참고했다.

 

김동건

• 문학석사 수필가

• 동양미술사 전공(홍익대 대학원)

• 인천대/호원대/안산공대/청운대 외래ㆍ겸임교수 역임

• ‘백제문화사대계’ 편찬위원 (재)충남역사문화원

• 한반도문학 신인상(2018년 제4회ㆍ수필부문)

• 문화체육관광부(한국예술인복지재단)선정 예술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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