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 칼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강인 | 기사입력 2022/12/19 [09:20]

[강인 칼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강인 | 입력 : 2022/12/19 [09:20]

12월은 성탄의 계절이라고 한다. 이 성탄절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명절이기도 하다. 거리마다 성탄 트리(Tree)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렇듯 모두 즐거워하기에 크리스마스(Christmas) 앞에는 늘 ‘메리(Merry)’라는 수식어가 붙는가 보다.

 

그러나 필자는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탄생의 즐거움보다는 33년 후에 닥칠 참혹한 고난과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곤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이를 믿는 우리는 영생을 얻었기에 즐거울 수 있겠지만, 이를 위해 외아들을 사지(死地)에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할까? 아마도 정상적 사고(思考)의 소유자라면 비통하고 처절함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탄절을 마냥 즐거워만 하는 것은 철없는 인간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이번 주간이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이렇듯 크리스마스가 1주일 앞으로 다가오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고난의 한 주간이 생각난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과 함께 가장 혹독한 고난을 겪은 성경 속의 인물인 ‘나다나엘(Nathanael)’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바돌로메(Bartholomew)’라고도 불리우는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지만 수제자인 베드로나 신약성경 4복음서의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과 같이 유명세도 얻지 못한 채 당대는 물론 후세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도로서, 다만 성경 전체를 통해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만 잠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구절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 큰 칭찬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 두 가지 칭찬이란, 요한복음 1장 47절의 기록과 같이 하나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와 또 하나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이다. 그중 전자(前者)의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은 신학적(神學的) 소지가 다분한 표현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후자(後者)의 ’간사함이 없는 성품‘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

 

필자는 앞서 소개한 요한복음 1장 47절을 읽다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구절에서 시선이 멈춰졌다. 그리고 한동안 깊은 상념에 잠겼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앞으로 예수님이 정치적인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기대하며 어머니를 앞세우고 은밀하게 찾아가 ”왕이 되시면 (우리를)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특혜를 부탁하였고, 예수를 은화 30전에 팔아먹은 유다와 또한 예수께서 붙잡혀 심문을 받던 위기의 순간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가 있었던 것을 볼 때 나다나엘과 같이 간사함이 없는 성품의 인물을 ”참 이스라엘 사람(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찬하신 예수님의 뜻과, 후세인들에 의해 이름 앞에 ‘성(聖,Saint)’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이 붙게 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예수님의 예견과 같이 나다나엘에게는 끝까지 간사함이 없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그는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전도하다가 이교(異敎) 사제들의 선동으로 '아스티아제스'라는 왕에 의해 참수되었다. 그는 산 채로 칼에 의해 전신의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머리가 잘리는 가장 처참한 혹형으로 예수님을 위해 순교했던 것이다.

 

▲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 있는 성 바돌로메(St. Bartholomew, 나다나엘) 조각상. 마르코 다그라테(Marco d'Agrate)의 1562년 작품. 순교시 산 채로 벗겨진 피부를 어깨에 걸치고 본인의 피부를 벗긴 단검의 모형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모습.

 

헬라어 성경에는 이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돌로스(δολος)’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속이는 자’, 또는 ‘간교한 자‘라는 뜻으로 그 어원(語原)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던지는 '미끼'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 미끼란 물고기를 속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영어성경 KJV(King James Version)에 보면 ”In whom is no guile!“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도 ‘가일(guile)’은 헬라어 돌로스와 마찬가지로 ‘간교한 속임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한글 사전에서 ‘간사하다’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니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나쁜 꾀를 부리는 등 마음이 바르지 않다’ 또는 ‘나쁜 꾀가 있어 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과연 인간으로서 ‘나는 간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 2장에 보면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자왈 시삼백 일언이 폐지 왈사무사)“라는 글이 있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의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사(邪)는 ‘간사하다, 마음이 바르지 않다, 사악하다, 품행이 부정하다.’라는 뜻이다. 즉 사무사(思無邪)는 한마디로 ”생각이 간사하지 않다“로 풀이된다.

 

간사함은 사사로움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간사함을 없애는 것이 군자(君子)의 수신(修身) 목표다. 즉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는 자를 군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아 공자는 ‘사무사’를 인간 됨의 기본 덕목으로 삼은 것 같다.

 

자고로 우리 주변에는 간사한 자들이 너무 많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고금(古今)을 통해 군주나 국가(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 공직자의 임무이다. 그러나 사리사욕으로 인하여 간사함을 버리지 못한 간신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 예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을 들 수 있다. 그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흐르게 했던 인물이다.

 

이방원은 조선 개국 전 고려말기의 충신인 정몽주(鄭夢周)가, 자신이 읊은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답글로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전한 〈단심가(丹心歌)〉를 보고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했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형제인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은 물론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과 처가 민씨 집안까지 도륙을 냈다.

 

또한 그는 정도전과 사림(士林)세력들이 추구했던 신권(臣權)정치에 맞서 왕권(王權)정치를 정립하고 수호했던 인물로, 이에 반대하거나 위협이 될 기미가 보이는 자들은 모두 주살(誅殺)했다. 신하는 물론 친가와 외가, 처가까지 예외가 없었다. 그는 왕권이 확고해질 때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왕권에 맞서거나 장애가 될 모든 인물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태종(太宗) 이방원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열 명의 신하가 있다고 치자. 그중에 한 명은 틀림없는 충신이고 또 한 명은 반역을 꿈꾸는 역적이다. 그리고 나머지 여덟 명은 내가 강하면 충신이 되고 내가 약해지면 역적이 된다. 그렇다면 그 여덟 명은 누구일까? 그 ‘여덟 명’은 모두 간신(奸臣)이다. 즉 간사한 신하를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앞서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 정몽주와 주고받았던 이방원의 글인 ‘하여가’, 즉 시류(時流)에 영합하는 이방원의 삶의 내용이 그 여덟 명의 간사한 모습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신념이 없는 간사한 정치인의 모습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정권 때마다 그 ’여덟 명‘에 해당하는 간사한 정치인들이 수없이 존재해 왔다. 

 

권력을 남용하는 자, 부정 축재하는 자, 신념이 없이 필요에 따라 쉽게 당적을 옮겨다니는 자, 배신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속이는 자, 아부하는 자 등 간사한 무리 들이다. 바로 그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의 행복을 가로막은 장본인들이다. 모두가 언론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바 굳이 실명(實名)은 거론치 않으려 한다.

 

글을 쓰면서, 과거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칭찬을 받았듯이 과연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보라, 이는 참된 정치인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라는 재미있는 생각마저 해 보았다.

 

오늘은 성탄을 1주일 앞두고 이를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캐롤 보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기억하는 'Remember Me(나를 기념하라)'라는 제목의 합창곡을 함께 듣고자 한다.

 

이 곡의 제목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친히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부탁하신 말씀이다.

 

 

물론 필자도 예외일 수는 없지만 오늘은 제 주변에 존재하는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과연 우리는 현재 무엇을 위해서 살고있는가?‘하는 생각에 깊이 빠져드는 날이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외부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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