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 칼럼] 당의정(糖衣錠) 문화

강인 | 기사입력 2023/04/10 [10:07]

[강인 칼럼] 당의정(糖衣錠) 문화

강인 | 입력 : 2023/04/10 [10:07]

작금의 우리의 문화적 풍토는 가히 당의정(糖衣錠)에 비유해도 좋을 듯하다.

 

당의정이란 먹는 알약의 쓰디쓴 맛을 겉만 달짝지근한 당분으로 도포(塗布)시켜 입속에서는 잠시 그 쓰디쓴 맛을 모르도록 한, 참으로 영특한 사람의 머리가 만들어낸 의학용어다. 

 

그러나 당의정은 때때로 어떤 위선적인 것을 비유할 때 곧잘 사용되기도 한다. 속의 내밀한 쓴맛을 숨기고 겉만 사탕발림으로 해 놓은 그 저의가 결코 건전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순수음악계에 이런 경향이 더러 눈에 띄어 실망스러움을 안겨 주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예술이 본래의 의미를 많이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실용주의(實用主義-Pragmatism)가 예술문화에 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상업성을 말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José)'는 ‘대중의 반란’이라는 저서에서 “예술에 상업성이 개입되고 대중성과 그것의 특징인 익명성이 받아들여지면서부터 전체적으로 품위가 떨어지고, 반대로 대중들의 취향은 다소 상승했더라도 어느 수준에서 발전될 줄 모르는 집단 무감각의 상태로 빠져든다”고 했다.

 

실용주의란 실생활의 유용한 지식과 실용성이 있는 이론만이 진리로서의 가치가 있다라는 주의다. 이 실용주의로 말미암아 순수음악이 승화된 예술성보다는 먹고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신설 대학마다 '실용음악과'가 생겨나고 공연 현장에서는 일부 성악가들이 팝이나 영화음악은 물론 심지어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마구 불러대고 있다.

 

이런 분들은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만큼 대중의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고 자기 나름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순수음악의 심오한 경지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성악은 발성이 중요하다. 가요(歌謠)와 같은 대중음악은 흉성(胸聲)으로, 클래식컬(Classical)한 성악은 두성(頭聲)으로 노래한다. 그런데 대중음악에 비해 클래식컬한 성악의 두성은 호흡의 조절과 함께 끊임없는 발성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악가가 가요를 부르기는 쉬워도 대중가수가 오페라나 가곡을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성악가가 부르기 쉽고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가요를 마구 불러대다가는 발성의 기능이 무너져 순수음악의 예술성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탈선이고 오만이며, 돈이나 인기 등 다른 목적을 탐하는 부끄러운 행위인 것이다. 

 

필자는 대중음악의 존재를 격하시키거나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음악이나 순수음악이 각자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가곡이나 오페라는 너무 무겁고, 가요는 너무 가벼우니 대중들에게 알맞는 음악이 보급되어야 한다며 음악의 중도(中道)를 주장한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중도’가 아니라 ‘중간(中間)’의 의미로 도대체 기본도 모르는 자들의 허황된 말에 불과하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생겨난 정체불명의 이무기와 같은 류(類)가 바로 '팝페라'이다. 이 팝페라가 음악계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은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중도란 원래 불교 용어인데 "유(有)나 공(空)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라는 뜻이다. 즉, 중도는 각자 자기의 주어진 일에 정진하다 보면 트라이앵글(Triangle)과 같이 완전한 정점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비록 한 시절 지난 분들의 이야기지만 아직까지도 가곡 '목련화'를 테너 ‘엄정행’보다 더 잘 부를 대중가수가 누가 있겠고 '동백아가씨'를 ‘이미자’보다 더 잘 부를 소프라노가 누가 있겠는가?

 

음악예술에 있어서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클래식이라 일컫는 순수음악과 대중음악이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우리 음악문화에 균등한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차제에 바라기는 문화예술정책을 이끌어가는 현 정부도 이러한 중도와 중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음악예술은 실용주의가 아니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경지이다. 음악에 있어서 실용성이 높아지면 예술성은 저하된다. 이 실용주의가 예술성을 저하시켜 국민의 정서를 피폐케 하고있는 것이다.

 

어떤 음악평론가는 이를 부추기듯 인터넷에 아래와 같은 글을 실었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성악가는 소위 벨칸토(Bel canto) 창법에서 성공하면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벨칸토식 창법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성악가들이 변신하지 못하면 대중들의 관심에서 사라지는 환경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성악가도 팔색조(八色鳥)가 되어야 했다. 많은 성악가들이 이런 세상에 도전했다. 그러나 대중의 갈채를 받는데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변신에 있다. 대중가요나 크로스오버를 노래하면서 여전히 벨칸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건 변신이 아니다. 대중가요를 가곡이나 아리아 부르듯 하면 그건 대중가요가 아니다. 조수미가 노래하는 영화음악, 재즈, 민요, 팝을 들어보면  그 노래들에서 조수미는 완벽한 딴따라가 된다. 팔색조 조수미를 만나게 한다. 그래서 대중들은 환호하고 그 음원을 산다....." 

 

마치 성악가들에게 먹고살려면 대중가요를 부르라고 권유하는 글 같다.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예술을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먹고사는 문제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원금 명목으로 돈이나 나누어주는 정치적 포퓰리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옛말에 “자식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듯이 예술가에게 어장과 물고기 잡을 환경 및 기회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술가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예술가의 탈선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찾아 배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진 복지사회의 전형(典型)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정책부재’이고 예술가는 ‘의욕부재’이다. 이는 정부는 무지하고 예술가는 연약해서이며 사회는 이를 체휼(體恤)할 문화적 기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는 눈으로 확인되는 대중의 갈채가 성공의 상징은 아니다. 대중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대중음악이지 예술음악이 아니다. 순수예술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대상은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인정받는, 소위 먹고 살 만한 성악가들이다. 바로 이런 분들의 탈선을 우려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거침없이 변신하는 팔색조가 아니라 고고(孤高)한 백조가 되어야 한다.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가의 자존심이며 사명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름 앞에 예술가, 성악가라는 호칭을 떼야 할 것이다. 적어도 벨칸토 창법의 순수 가곡과 오페라를 사랑하는 필자와 같은 음악 애호가가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는 한..... 

 

한 가지 재미있는 기억이 떠오른다. 1978년 서울에 세종문화회관이 개관되던 해, 지명도 높은 국내 모 언론사가 전국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던 적이 있었다. 내용은 당시 클래식, 대중가요, 팝을 막론하고 가수의 인기 순위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1위는 조용필이었고 뒤를 이어 2위는 놀랍게도 테너 엄정행이 차지했다.

 

엄정행은 가곡이나 오페라를 부르는 성악가다. 특히 시쳇말로 ㅇ나 ㅇ나 다 간다는 해외유학도 가보지 않은 순수 국내파(?)다. 그런데 이렇듯 가곡으로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성악가이기도 했다. 그후 방송국마다 엄정행에게 가요나 팝송을 부르라고 강요하다시피 했고, 레코드사는 이러한 노래를 취입하기 위해 교섭이 쇄도했었다. 아마 당시 마음만 먹었으면 엄정행은 큰 부(富)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정행은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결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가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이름과 같이 성악가로서 ‘바르게 행한(正行)’ 모습이 아닌가 여겨진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당시 엄정행과 함께 대중의 인기를 누리던 성악가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테너 박인수다.

 

그는 서울음대 재학시절 가끔씩 창경원(그 당시는 동물원) 호랑이 우리 앞에서 포효(咆哮)하는 순간을 포착(捕捉)하기 위해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는 발성(發聲)을 터득하기 위해서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소리 같으나 그만큼 열정있는 성악도였다. 그 후 그는 뉴욕의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하고 서울음대 교수가 되었으며 2000회 이상의 독창회와 300편이 넘는 오페라의 주역으로 출연하는 등 한국의 대표적 성악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던 중 그는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가수 이동원과 함께 듀엣으로 부른 ‘향수’라는 노래를 통해 130만 장 이상의 음반이 판매되었을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반면 순수음악계에서는 큰 반발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가 단장에 내정되었던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되기까지 했겠는가?

 

박인수는 지난 2011년 10월 15일 ‘문화의 날’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어찌보면 성악가로서 바른길을 지킨 자에겐 훈장이 없고 오히려 외도(外道)한 자는 훈장을 받았다는 것이 퍽 아이러니(Irony)하다. 이는 훈장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문화 수준이 비슷해서일까? 아무튼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수준임은 확실해 보인다.

 

최근, 금년에 맞이하는 한미동맹 70주년에 즈음하여 한미정상회담시 문화행사 계획을 두고 설왕설래한 바 있다. 이에 따른 제반 사정은 차치하고 현재 북한의 무력도발이 점점 더 심화되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생명줄과도 같은 한미동맹의 강화를 바라는 음악회가 여흥(餘興)의 느낌이 강한 팝 뮤직보다는 순수음악을 통해 우리의 간절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 시대 당의정 문화라는 불명예도 음악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며 순수예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뚝심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언젠가는 반드시 벗겨질 것이라 확신한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 외부필진의 기고 ,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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