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거나 버리거나
마음을 비우니까 온 바깥이 내 것이라고 나 이렇게 부자라서 행복하다고 전화하는 친구가 있다
한 뙈기 밭이나 일구며 살아야지 빈자의 행복 비슷한 말을 하다가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오로지 무궁한 이 강령이 내게 이르기까지는 멀다 인천 앞바다의 사이다처럼 나는 목이 마르고
버리고 비워서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고함을 버럭버럭 견디다가 ‘니 누고?’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 ‘네온사인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요.’ 하루도 네온사인 없는 곳에서는 살기 싫다며 정색하는 아내를 바라보던 친척 아저씨의 표정이 어두웠다. 젊은 날부터 준비했던 전원의 삶을 시작하고, 친척들을 초대했다. 친척들은 텃밭에서 직접 상추와 쑥갓 이파리를 따며 즐거워하고, 연못 속을 헤엄쳐 다니는 도롱뇽 새끼들을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고, 굴참나무 가지 끝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에 탄성을 지르고, 풋내나는 살구와 자두 열매를 쓰다듬고, 토실토실한 매실 열매를 신나게 땄는데.... 작약 향기와 희고 둥그런 불두화가 은은한 초저녁, 찻잔을 앞에 두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은퇴 후 시골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친척 아저씨 말씀에 어둠이 싫고, 벌레도 곤충도 무섭고, 고요한 적막도 싫고, 친구도 가까이 없어 싫다며 친척 아주머니는 힘껏 도리질했다. 순간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인간이 변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무얼까? 변화란 살아오던 익숙한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변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불안이 따른다. 그동안 익숙해져 예측이 가능했던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인체가 바라는 것은 항상성(homeostasis )이며, 싫어하는 것이 변화이다. 체온도 늘 36.5도를 유지하려 하고, 인체 내 저수량, 에너지 비축량, 심박동 수, 호흡수 등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만약 이것들에 급격한 변화가 온다면, 인체엔 대응키 어려운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 상태도 변함없이 고요하기를 바란다. 감정의 굴곡에 따라 신체적 반응도 불규칙하게 변하는데,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는 인체는 이때 많은 소모와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변화를 싫어하는 요인으로, 변화는 타인에게 기회일지 모르나 자신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변화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으로 변화에 압도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변화를 주도하려는 사람의 동기를 의심하거나 결과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앞서, 상대와는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이라고 저항한다.
“한 뙈기 밭이나 일구며 살아야지/빈자의 행복 비슷한 말을 하다가/늦었다며 택시를 타고/집으로 가는 사람”, “마음을 비우니까/온 바깥이 내 것이라고/나 이렇게 부자라서 행복하다”는 사람, “버리고 비워서/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보았다/할아버지는 고함을 버럭버럭 견디다가/‘니 누고?’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며,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오로지 무궁한 이 강령이/내게 이르기까지는 멀다”는 시인의 전언에서, 왜 우리나라 베스트 셀러 서열의 앞자리에는 “비우거나 버리거나”를 강조하는 서적들이 채우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무조건 비워내려고만 하지 말고 비워낸 곳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취사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달라야 할 것이다.
텃밭 야채와 매실 열매를 담은 천 가방을 흔들며 친척들은 네온사인 번쩍이는 서울로 떠나고, 별들이 돋아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젊은 날부터 오랜 시간 준비하고 계획했던 ‘도시 놓아주기’를 실천한 이유를 생각했다. 조직과 타인에 의해 설정된 시간 속에서 ‘낙타’처럼 짐을 지고 인간 사막을 건너던 노동을 마치면, 일도 놀이처럼 하고 싶었다. 아이의 눈으로 보고, 아이의 귀로 듣고, 아이의 마음으로 자연과 어우러지고 싶었다.
도시 생활에서 잃어버리고, “비워진” 곳에 자연이 스며들고 있다. 네온사인으로 잃어버렸던 어둠 속에서 시력을 회복하고, 수백만 광년 동안 달려와 눈물처럼 반짝이는 별빛과 눈을 맞추며 우주 속에 하나로 연결된 존재를 느낀다. 숲을 가득 채우는 온갖 풀벌레 소리, 새 소리의 오케스트라 속에서 귀가 밝아진다. 매실, 살구, 자두, 호박, 고추, 토마토와 같은 열매도 밤에 잠을 잘 자야 튼실하게 익어가듯, 사람도 깊고 고요한 어둠 속에서 숙면해야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뿐이랴 어둠이 깊어야 부엉이도 소쩍새도 다른 야생의 생명도 살아갈 수 있다. 한때의 감정만으로 변화를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버리고, 비워야”할 것이 아니라 “비워내고, 버린” 곳을 어떻게 할 것 인가에 대한 구체적 전략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와 시간과 실천이 병행될 수 있어야 하리라.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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