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고있는 마을에는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자주 가는 곳이다. 오늘도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그곳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맞은편 벽에 붙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드라이플라워] 한 바구니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손님의 시각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로 거기에 올려놓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앙상하게 말라붙은 장미꽃의 잔해가 옹기종기 모여있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두 갈래로 흩어지게 한다.
혹자는 이를 통해 세련된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윤기 흐르는 중후한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겠으나, 필자의 느낌은 생화의 싱싱함이 가득 담긴 장미꽃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어디 가고 해골처럼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꽃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계속 인정해 주길 강요하며 트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 역겨울 지경이다.
얼마나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그리고 교양미 넘치는 이름인가? 하지만 그 멋진 이름 이면(裏面)에는 꽃으로서의 생명을 계속 고집하려는 시들어버린 존재, 꽃의 진실을 거짓으로 계속 대신하려는 허상(虛像)의 그림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꽃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대지(大地)가 품은 생명의 수액을 힘껏 빨아올릴 때만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꽃의 존재 의미요, 꽃의 살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그러나 드라이플라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첫째, ‘생명’을 잃어버렸다. 드라이플라워는 꽃이 아니다. 꽃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꽃을 보며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시든 꽃에서는 향기를 맡을 수 없다. 이는 생명의 약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둘째, ‘생각’을 잃어버렸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 했고,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하지만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인간의 생각은 머리에서 나온다. 그런데 드라이한 인간은 머리는 없고 대가리만 있다. 혼자 잘났다고 깃털을 세우고 폼잡고 다니다가 위험이 닥치면 모래 속에 파뭍고 꼼짝도 하지 않는 타조 대가리다.
셋째, ‘진실’을 잃어버렸다. 드라이플라워는 거짓으로 계속 대신하려는 허상(虛像)의 그림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득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 떠오른다. 리플리 증후군은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언행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하는 용어로 미국의 여류 소설가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1955)]라는 소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증상은 허풍이나 과장과는 달리 자신의 거짓 언행에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드라이플라워의 실상이다.
인간은 꽃이다. 이는 조물주의 창조 원리다. 날로 혼탁하고 각박해져 가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향기로운 생화로 존재해야 한다. 손으로 쥐면 이내 가루가 되어버리는 바싹 말라버린 드라이플라워가 아닌, 싱그러운 생명력을 지닌 살아있는 꽃으로 계속 피어나야 한다.
모든 인생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사회 지도자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종교 지도자가 그렇고 문화예술, 교육, 기업,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분들에게서 가끔 드라이 플라워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가끔' 이라는 표현 자체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만...)땅속 깊히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자양분을 취하며 계속적으로 피어 오르는 꽃이 아니라 한번 피워놓은 꽃으로 영원하려 하는 자들의 시들고 퇴색한 모습들. 즉 꽃의 모습은 남아 있되 시들어 향기가 없는, 이미 생명을 잃은 꽃의 모습에서 연민(憐愍)의 정이 느껴진다.
요즘 드라이한 옛 정치인들이 눈에 띈다. 아니,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라 떼지어 기어나와 활개를 친다. 스멀스멀하고 역겹다. 앞으로 9개월 후인 내년 4월 총선 때문이다. 국회의원 공천이 어려우면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굳이 이름을 나열하지 않아도 언론을 통해 대부분의 국민이 짐작하고 있는 자들이다. 도대체 이런 자들의 뻔뻔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런지?.....
필자는 찻집 안에 놓인 [드라이 플라워] 바구니를 바라보면서 그런 뻔뻔하기 그지없는 잡인(雜人)들을 저렇게 박제하여 ‘드라이 맨(Dry Men)’으로 한곳에 묶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기막힌 상상을 해보았다. 보는 이마다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 그런 상상을 말이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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