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미국 LA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인 ‘테메큘라(Temecula)’에 살던 때 일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문 밖이 어스름하다. 아직 이른 시간인가 여겨져 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흐린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은 시각인 7시경이 되어서야 집을 나서게 되었다. 평소 이때쯤이면 이미 해가 높이 솟아 따가운 아침 햇살을 쏟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온통 시커먼 먹구름이 해를 가리어서 세상은 마치 새벽 미명(未明)과도 같이 어둠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눈에 보이는 세상이 침침하니 어쩐지 마음도 우울해지는 것 같다. 게다가 횡단보도의 신호등마저 매번 빨간불이 내 발걸음을 붙잡아 순조롭지 않은 보행 리듬으로 인해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약 30분가량 더 걷다보니 215번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에 이르렀다. 출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철조망 아래로 보이는 고속도로는 상, 하행선의 차량 행렬이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리버사이드(Riverside)'를 향한 상행선은 거의 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소통이 원활한 반면 출근 인파가 많은 '샌디에고(San Diego)'를 향한 하행선은 극심한 체증으로 마치 주차장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 곳 온갖 상념에 사로잡힌 채 걸었다. 검은 먹구름이 시야를 어둡게 하고 횡단보도 마다 빨간 신호등이 켜져서 가는 길을 멈추게 하고, 고속도로의 한쪽 길은 순탄한데 다른 한쪽 길은 체증으로 인해 꽉 막힌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현재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동안 나의 존재조차도 세상에 알리지 못한 필부(匹夫)가 세상을 일찍 등지고 기다린 세월이 십수 년인데 이제 한국에서의 부름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건만 이를 가로막는 요인들로 인해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니 몹시 우울했다. 순간 나의 뇌리를 파고든 생각의 끝은 바로 ‘불공평’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에 느껴지는 우울함이 어느새 강퍅(剛愎)함으로 변했고 내 입에서는 공평치 못한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던 중 우연히 라디오를 켜니 미주복음방송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송명희' 시인의 시에 ‘최덕신’이 곡을 붙인 [나]라는 제목의 복음송이다.
오늘따라 이 노래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이 노랫말은 나의 뇌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며칠간 인간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 속에 지내 온 터라 그런지 평소 아름답다는 정도로만 느껴졌던 이 노래가 오늘은 감동으로 다가오며 어느새 내 속의 시끄러움이 평안으로 바뀌었다.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라고 한 성경 시편 94편 19절 말씀과 같이 '송명희' 시인의 시를 통해 내게 위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들 한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정직한 자와 거짓된 자, 신의를 지키는 자와 배신하는 자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불공평함. 그러나 이는 세상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공평한데 욕심으로 가득 찬 음흉하고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불공평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나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앞서 언급한 송명희 시인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송명희’ 그녀는 당시 43세의 선천성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치료도 못 받은 채 일곱 살 때까지 내내 누워 지냈다. 그녀에게 희망이라곤 없었다. 모든 게 절망이었다. 그래서 자살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세상을 원망했다. 왜 이리 불공평할까? 그래서 신을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 소리쳤다. 울부짖었다. 왜 공평하지 않으시냐고.....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펜을 들었다.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그녀였지만 그런데 시를 쓴다. 완성된 시에 ‘나’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 무었도 달라진 건 없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달라졌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상은 그대로지만 그러나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살아 있다는 것만도 감사의 조건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어눌한 입으로 희망을 말했다. 그동안 2,500여 회의 강연을 했다. 뒤틀리는 손으로 시를 써 28권의 책을 냈다. 그의 시에 곡조가 붙는다. 200여 곡의 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전신마비가 된 것이다. 말도 못 한다. 글도 못 쓴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을 감사하니까. 그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좌절을 경험한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불공평해서 내게 좌절을 준 게 아니다. 또 다른 내가 나에게 준 좌절이다. 끝이라면 좌절할 수 있으나 끝이 아니기에 희망일 수 있다. 송명희도 살아간다. 나는 그녀보다 나을 것이다. 그렇기에 포기해선 안 된다. 이것이 송명희가 살아있는 이유다.
오늘 송명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라가 어렵습니다. 정치가 엉망입니다. 경제도 그렇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장래도 어둡기만 합니다. 그러나 어둡게만 보면 자꾸 어두워집니다. 이제 어둠이 물러가면 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분명히 남이 없는 것을 내게 주신 것이 있을 겁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세요. 그게 빛입니다. 빛을 향해 가세요. 모든 걸 감사하세요. 고난도 감사하세요. 아픔도 감사하세요. 슬픔까지도 감사하세요.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장 불공평한 세상을 살아가는 송명희 시인의 ‘공평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공평하시기에 세상은 공평하다. 불공평함 속에 공평함을 느끼며 사는 인생이 진정한 승리자이다. 감사로 공평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고, 감사로 공평한 세상을 누리시기 바란다.
정오가 지나 밖에 나가보니 선명한 녹색 신호등 위로 하늘이 말끔히 개어 해가 중천에 떴고 고속도로는 체증이 풀려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 출근시간과 달리 퇴근시간에는 상행선 도로가 막히고 하행선 도로는 열리겠지? 이러한 작은 일상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세상의 공평함을 느끼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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