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배의 바다이야기] 안면도가 섬이 된 까닭은

윤학배 | 기사입력 2024/02/05 [10:43]

[윤학배의 바다이야기] 안면도가 섬이 된 까닭은

윤학배 | 입력 : 2024/02/05 [10:43]

# 내륙운하는 아직도 전성시대

 

운하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인공수로는 기원전 4,000년경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서 굴착되었고 실제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수에즈나 파나마 운하 등 국제 항로에서의 운하가 국제 역학관계에서 매우 긴요한 것처럼 한 국가 내에 위치한 내륙운하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거나 또는 정치적 목적으로 운하를 건설하고자 했던 사례가 매우 많다. 

 

유럽은 아직도 운하 전성시대이다. 영국에서는 로마시대 때부터 내륙수로가 굴착되어 약 7,000km정도의 크고 작은 운하가 전국적으로 매우 치밀하게 발달되어 왔다. 물론 최근에는 물류보다는 주로 관광이나 환경사업 등에  이용되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활발하고 유명한 운하는 전장 3,400km에 달하는 국제운하인 RMD (라인 Rhine강, 마인 Main강, 도나우 Donau강(다뉴브 강의 독일식 이름)의 앞 글자를 딴 운하)운하이다. 이 운하는 유렵의 15개국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내륙운하이자 국제 운하이다. 유럽 물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기반 시설인 것이다. 

 

북미의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도 미시시피 강과 허드슨 강을 연결하는 운하나 5대호 인근에 위치한 시카고 등에서 볼 수 있는 소규모 운하 등 수많은 운하가 건설되어 해상교통 물류와 관광목적 등으로 현재 까지도 활발하게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동양으로 눈을 돌려보면 중국의 대표적인 운하는 북쪽 베이징에서 남쪽 항조우까지 2,000km 정도의 내륙운하로 남쪽과 북쪽의 시종점인 두 도시의 앞 글자를 따서 경항(京抗)운하로 불린다. 물론 현재까지 그 기능을 발휘하며 사용되고 있으나 기차나 도로 등 다른 운송수단이 발달하여 과거와 같은 명성은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물길 자체는 유지되고 있어 그 자체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경항운하 역사는 오래 되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구려 시대 때인 수나라 양제(재위기간 604-618)때 건설이 시작되어 13세기에 완공되었는데 산물이 풍부한 남부 지방의 물품을 북쪽의 베이징으로 운송하기 위해 건설한 운하이다. 북쪽에 동서 방향의 산악을 중심으로 방어를 위한 만리장성이 있다면 남북 방향으로는 강과 호수를 연결하는 5천리 물길 경항운하가 있는 것이다. 이 경항운하는 경제적인 측면과 더불어 중국대륙의 통일과 소통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건설된 것이다.

 

▲ 지난 2009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안면도 할매바위의 일몰  © 문화저널21 DB

 

# 안면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다

 

우리나라에도 운하가 있었나? 우리 한반도는 종심이 짧은 까닭에 운하가 발달하지 못하고 소규모 운하만 건설되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충청남도 안면도의 판목운하이다. 이 판목운하가 안면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원래 안면도는 섬이 아닌 육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호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인 곡물을 운송하는 세곡선(稅穀船)이 자주 풍랑을 만나 피해를 보자 이를 막기 위해 천수만과 서해를 연결하는 안면도를 뚫어서 300미터 길이의 판목운하를 만들고 세곡선이 운항하도록 하였다.

 

바다를 등한시했던 조선시대에는 연안 항해 또는 목측 항해라 하여 가능한 육지에 가까이 붙어서 해안의 주요 지형을 보며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판목운하를 건설하게 된 것인데 조선 인조 때인 1638년이었다. 이 판목운하는 실제로는 고려시대인 12세기부터 운하를 건설하자는 이야기 나온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데 500년 후에야 운하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험한 해역으로 피해가 많아서 지금도 그 해역에서는 침몰된 수많은 난파선의 흔적들인 도자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운하가 개통되고 난 이후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제 편안하게 잠잘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섬 이름을 ‘안면도(安眠島)’라 지었다. 졸지에 육지에서 새롭게 섬으로 탄생한 안면도의 운명이다. 사실 천수만과 북쪽의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10키로 정도 길이의 본격적인 ‘굴포운하’도 여러 차례 시도되어 실제로 굴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중간쯤에 엄청나게 큰 암반이 나와 실패하고 그 흔적만 남았다. 이 굴포 운하가 성공하였다면 조선시대 우리 해양과 운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그 운하가 성공했다면 지금의 안면도처럼 태안반도 전체가 섬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종심이 매우 짧고 계절별 강수량 편차가 큰데다가 운하건설에는 매우 어려운 산지가 많은 지형이라 유럽이나 미주와는 다르게 내륙운하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최근 건설된 경인 아라뱃길도 실제로는 운하로의 물류기능은 하지 못하고 주로 홍수시의 방류기능이나 자전거 길로 부수적인 기능에 치중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운하건설과 활용을 통해 경제와 정치적인 발전을 도모했던 유럽 등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정쟁으로 흘렀던 우리의 운하 논쟁과 논란은 더 아쉽게 다가온다. 

 

운하의 물줄기는 오늘도 흐른다.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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