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10일 영국 남부 항구도시 사우스 햄프턴(South Hampton) 항에서는 지구상 가장 크고 가장 호화로운 여객선 타이태닉호(타이타닉호)가 출항하고 있었다. 타이태닉호는 무게 5만2천 톤에 그 길이가 260미터로 당시까지 인류가 물에 띠웠던 가장 큰 선박으로 꿈의 여객선이자 최고 기술의 최첨단 선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최첨단 엔진은 증기기관이어서 타이태닉은 보일러에 석탄을 때서 나오는 수증기를 동력원으로 하는 증기선이었다. 타이태닉 사진을 보면 배위에 솟아 있는 굴뚝 네 개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석탄을 싣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때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태닉에는 증기기관에 석탄을 때는 화부(火夫) 176명이 승선하였다. 이는 전체 승무원 880명 중에 20%이상 차지하였는데 타이태닉호 밑바닥에서 가장 험한 업무를 하던 승무원들로 침몰당시 마지막 까지 맡은 일을 담당하며 전원이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였다.
이 타이태닉호에 승선한 2,200여명의 승객과 선원 및 승무원들은 모두 신대륙인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각양각색의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1912년 4.15일 북미 뉴펀들랜드 인근 해상에서 거대한 빙산과 충돌하여 1,5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침몰하고 말았다.
타이태닉 비극 100주년이 되는 2012년 영국은 타이태닉 침몰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타이태닉 선박이 건조된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 타이태닉 박물관을 개장하였다. 타이태닉 사고당시 가장 어린 승객으로 구조되었던 밀비나 딘(Milvina Dean)이라는 생후 9주된 여자 갓난아기가 있었는데 이 최연소 생존승객은 이후 97세가 되던 2009년 까지 생존하여 최후의 생존자로 기록되고 있다. 1997년 영화 타이태닉의 주연이었던 레오나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즐릿이 생활고를 겪던 이 생존 할머니의 노년의 생활비용을 부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타이태닉의 침몰은 그 자체로 더 할 수 없는 비극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다에서의 안전이나 구조와 관련한 거의 모든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타이태닉 사고는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해상 교통 사고였다. 그러나 사고당시 타이태닉에는 승선인원 2,200명에 턱없이 부족한 1,178명이 승선할 수 있는 구명정 밖에 구비되지 않아서 애초에 전원 탈출은 불가능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듯이 탈출순서를 정해서 여자와 어린이 먼저 탈출 시키게 된다.
사고 직후인 1914년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은 선박에 반드시 구비해야할 구명정과 구명조끼 등 구명설비 등을 정해서 강제적으로 구비하도록 하는 협약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라 선박의 안전기준을 강제화하는 국제 해상협약의 시조인 해상인명구조협약 즉 SOLAS(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협약이 탄생하였다.
지금은 정원에 130%에 해당하는 구명설비를 선박에 비치하도록 강제되어 있다. 또한 선박에 격벽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서 한곳이 침수가 되면 전체 선박이 침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박구조도 방화벽을 두듯이 변경하였다. 또한 사고당시 타이태닉 선박에서 발사한 SOS 조명탄이 일반 불꽃과 색이 동일하였기에 20km 정도 떨어져 있던 선박에서 불꽃을 보았지만 구조요청 신호인지 알지 못해서 구조하러 오지 않았다 한다. 이렇듯 조명탄이 발사되어도 인근을 지나는 다른 선박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으로 착각이 될 수 있었기에 SOS 구조 신호탄에 짙은 붉은색을 추가하여 쉽게 구별이 되도록 변경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 해상에서의 안전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1948년 UN의 전문 기구로 국제해사자문기구(IMCO)가 설립되고 1982년 국제해사기구 IMO(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로 그 명칭이 변경 되었다. 해양 안전문제를 다루는 IMO가 영국 런던에 소재하는 것에는 해양대국 영국의 전통과 타이태닉이라는 배경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타이태닉 침몰의 주원인이 된 빙산과 같은 잘 보이지 않는 수중물체를 쉽게 탐지할 수 있는 수중음파탐지기 쏘나(SONAR)가 1914년 캐나다에서 개발되는데, 이 쏘나는 현재의 잠수함 등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기술이다. 또한 타이타닉이 침몰되던 당시에는 위급 상황시 통용되던 무선구조신호는 일반적으로 CQD(Come Quick Danger) 즉 ‘위험하니 바로 와 주세요!“ 였다. 그러나 이 글자가 무선 전신으로 송신하기 어렵고 불명확하기 때문에 가장 간단하고 명료하며 보내기 쉬운 SOS가 타이태닉 사고이후 널리 사용되게 되었고 전 세계의 공식적인 구조신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타이태닉 침몰로 선박 자체는 사라졌지만 세계 해양안전 분야의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국제 해상안전협약과 IMO라는 또 다른 모습과 이름으로 재탄생되었다. 가슴 아픈 비극이었지만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전 세계와 미래의 해양안전을 보장하는 매우 소중하면서도 값비싼 기여를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잔인한 달 4월’을 보내며, 해양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되새겨 보아야 한다.
‘타이태닉’은 국제 해상안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윤학배 1961년 북한강 지류인 소양강 댐의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면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강원도 춘성군 동면의 산비탈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붓당골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춘천 근교로 이사를 한 후 춘천고를 나와 한양대(행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85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986년 당시 해운항만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바다와 인연을 맺은 이래 정부의 부처개편에 따라 해양수산부와 국토해양부 그리고 다시 해양수산부에서 근무를 하였다. 2013년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 2015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해양수산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31년여의 바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공직 기간중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UN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와 영국 런던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6년여를 근무하는 기회를 통해 서양의 문화, 특히 유럽인들의 바다에 대한 인식과 애정, 열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행정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호모 씨피엔스 Homo Seapiens”가 있다.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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