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어머니는 늘 ‘나중에, 나중에’로 미루었다 먼 훗날 네가 크고 자〜알 살게 되면 그 통에도 꼬박꼬박 날짜는 흘렀는데 옛날보다 나는 크고 자〜알 살게 되었는가 나중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떠나시고 ‘나중에, 나중에’를 어디 가서 찾을까 나중은 깊은 절간 요사체에 붙잡혔나 나중이 오는 길은 문턱이 닳고 닳아 철통같은 궁성 안에 보신하고 있는가 오는 길 미끄러워 되돌아가 버렸는가 서슬 푸른 눈으로 말총 갓 눌러쓰고 어디에 비켜서서 나를 보고 있는가
# “나중에”는 언제쯤일까? 일 년 후? 십 년 후? 아니다. 시인의 어머니는 “먼 훗날 네가 크고 자〜알 살게” 되는 그날까지 길게도 잡으셨다. 그런데, “나중에‘라는 시간은 존재할까?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알 수 있었다면, 어머니에게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시인의 어머니는 어린 딸의 사회적 성취를 위해 어머니 자신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으로 “나중에, 나중에”라는 유예된 시간을 선택하셨다.
기회비용이란 어떤 선택으로 인해 포기된 기회들 가운데 가장 큰 가치를 갖는 기회 자체 또는 그러한 기회가 갖는 가치를 말한다. 우리에게 시간, 돈, 능력 등 주어진 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일 때, 다양한 기회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다. 어떤 기회의 선택은 곧 나머지 기회들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 시인의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꿈이나 소망을 이루고 싶었던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딸에게 자신을 투사하였다. 딸이 자기 대신 자신이 포기한 모든 꿈과 소망을 성취해 주길 바랐기에 시인의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에 관한 것은 ”나중에, 나중에“로 미루셨다. “그 통에도 꼬박꼬박 날짜는 흘렀는데”, “나중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생만 하신 채 이승을 “떠나시고”만 것이다.
어머니께서 선택했던 기회비용의 댓가로 시인은 박사도 되고, 남성 중심 문화가 남아있는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교수도 되고, 시인도 되었다. 딸에게 자신을 투사시켰던 어머니는 시인의 사회적 성취를 자신의 성취인양 기뻐하는 시간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어머니 자신의 꿈과 소망을 밖으로 드러내 보지도 못한 채, 이승을 떠나셨던 것 같다. 어머니가 바라던 사회적 성취를 이룬 시인은 “옛날보다 나는 크고 자〜알 살게 되었는가” 반문해 본다. 그리곤 가족과 자식을 위해 “나중에, 나중에”로 미루었던 어머니의 유예된 삶을 바꿔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이 “서슬 푸른 눈으로 말총 갓 눌러쓰고/어디에 비켜서서 나를 보고 있”다고 고백한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드셨다(God could not be everywhere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라는 속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당신은 아직도 가부장적인 문화를 신봉하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 속담에 내재 된 어머니의 이미지 속에는 어머니의 가없는 능력과 헌신과 희생이 당연한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자식을 바르게 양육하려면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의 역할도 중요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고, 자식을 낳아 가족을 이루는 가족체계 속에는 부부와 자식 간의 위계(位階)가 필요하고, 부부간에도 사랑과 신뢰가 바탕이 되는 대등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족 모두가 올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국가의 지원과 환류(還流)도 필요하다. ‘문명사적 위험(civilization risk)’이 우려된다는 저출산 시대에 가족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해보는 오월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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