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어른이 된다는 것

홍사라 | 기사입력 2024/12/03 [09:32]

[홍사라의 풍류가도] 어른이 된다는 것

홍사라 | 입력 : 2024/12/03 [09:32]

  © 홍사라

 

어릴 땐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보였다.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고, 내 맘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그런 멋진 삶. 나는 그게 어른인 줄 알았다. 중고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는 그렇게 뭔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참 멋져 보였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줄 알았다.

 

뭐,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보니 전부다는 아니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니까. 나이를 나타내는 숫자가 점점 더 올라갈수록 조금씩 그 폭이 더 넓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자유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그걸 몰랐을 뿐. 그리고 학생이라면 매일같이 해야 하는 공부!!! 그놈의 공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던 날도 있다.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외우고 익히는 공부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 어른이라는 거, 나는 나이가 들면 그냥 되는 건 줄 알았다. 다들 그러기에, 정말 나이만 들면 어른은 그냥 저절로 되는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란 걸 안 것은 법정 성인의 나이 만 19세가 되고도 한참 지나서의 일이다.

 

막상 ‘어른’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내가 진짜 어른인 줄 알았다. 술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온갖 종류의 유흥을 거리낌 없이 즐길 수 있었으니까. 이제 막 20대가 된 친구들과의 유흥은 매일매일 반복해도 그저 즐겁기만 했다. 학고를 맞지 않고 제대로 졸업하려면 학과공부를 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도서관에 앉아 벼락치기 공부를 내 모습마저 마음에 들었으니까. 남들에게 당당히 성인임을 밝히며, 그렇게 신나기만 했던 20대를 보내고 나니 어느덧 30대.

 

30이란 나이는 20이라는 숫자보단 생각할 게 많았다. 그저 즐거운 일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취직이라는 높은 벽도 감당해야 했고, 학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니 사회에서 만나지는 사람들도 감당해야 했다. 그들은 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과는 달랐다. 좀 더 머리를 써야 한다고 해야 하나. 또 내가 회사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실적이 필요했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도 필요했다.

 

날 것의 느낌은 사라져가고 자꾸만 그 자리에 가미된 행동들이 들어찼다. 게다가 30대면 결혼을 생각할 나이다. 만나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할거라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어디 가서 만나야 하는지 고민이 많아지는 나이다. 출산을 했다면 아이를 키우느라 심신이 너덜너덜한 시간도 겪어야 한다. 그렇게 30대는 20대보다 맑고 순수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정말은 어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나이로는 어른이 확실한데, 실제로는 어른이 아닌 것 같은, 아직 자라지 못한 마음이 속에 가득 차 있다는 걸 여러 상황에 부딪혀가면 알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단지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40대가 되어보니 이제는 더 많은 것이 변한다. 일단 떠들고 다녔던 가치관이라는 것이 한낱 종잇장보다 얇은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름 괜찮은 어른이라고 으스대며 다녔던 시간이 한없이 부끄러워 질만큼, 아직도 나는 어른이 아니다. 누가 40을 불혹,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했을까? 난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흔들리고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이쯤 살았으면 정답을 알 법도 한데 난 자주 ‘너도 옳고, 너도 옳다.’ 고 말했던 황희정승 코스프레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일을 초연하게 지나치고 싶지만, 때때로 여전히 지극히 감정적이다.

 

예를 들면, 조카가 있을 때는 좀 멋진 어른으로 담대해지고 싶은데, 어떤 일에는 내가 더 놀라기도 하고, 너무 피곤한 날에는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말을 한다. 그러면 아이가 말한다.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놀러 와서 피곤한가?” 이쯤 되면 자기반성을 넘어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세상에 어른이라는 작자가 이런 거 하나 컨트롤을 못해서 애들 입에서 이런 소리나 나오게 하고 말이야. 한숨이 훅 나온다.

 

도대체 진짜 어른이란 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알고싶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음 스텝은 일단 시중에 나와 있는 아주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좋은 어른이라는 평가를 받는 공자나 노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나 빅터 프랭클 같은 어르신들의 책을 읽어본다. 그 책을 읽으면 뭔가 좀 달라질까 해서. 읽는 순간에는 뭔가 아주 쬐에~금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그냥 그렇다. 근데 그렇게 달라지고 있는 모습에 또 스스로 잠깐 뿌득한 것 외에는 글쎄. 하루만 지나도 도루묵이다. 이런. 

 

도대체 그놈의 진짜 좋은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건 언제 될 수 있는 걸까?

 

아직 나는 그 이상의 나이를 살아보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후에 운이 좋다면 살아가게 될 50, 60, 70…. 그리고 그 이후의 나잇대에서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위인전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만 나오던데. 그래서 위인전에 나오는 건가? 그래, 세계인구가 몇인데, 위인전에 나오려면 도대체 몇 명안에 들어야 하는 거냐. 

 

왜 진짜 어른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글쎄 정확한 대답은 아직 나도 잘 모른다. 그저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모두 어른이라는 존재가 되니까. 그리고 그 뒤에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 존재들도 계속 생겨나니까. 왠지 진짜 어른, 좋은 어른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라고 가르친다. 어른이라면 응당,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도 어쩌면 그리 좋은 어른은 아닐지도 모른다. 길에 숱하게 채이는 그저 그런 어른일 수도 있다. 과거에 연연하고 쉽게 상처받고 칭찬에 인색한, 그리고 그런 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기 싫은 그런 보통 어른.

 

어쩌면 꼴까닥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말 좋은 어른이라는 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있는지,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지. 이런 질문들에 계속 스스로 어설픈 오답을 내릴 뿐이다. 이렇게 답이 없는 질문을 때때로 내가 왜 하고 있나 싶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이 달래지면 이런 질문도 건네본다. ‘그래서 너는 얼마나 어른이 된거야?’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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