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섶 이야기
앞섶을 그럴듯하게 가다듬는 일이, 뒤태 단정한 일보 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있다. 뒷 모습 따윈 그들 사전에는 없다. 진실이란 그들에겐 위 선과 일심동체이자 불이(不二)인 까닭이다. 매무새나 채비란 전진하는 그들로선 오로지 앞쪽에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신념으로 증폭된 위선. 그건 그들의 단호한 앞가림에 서 더 강화되며 진화한다. 예컨대 그 방향은 불가역의 영역이다.
내 파자마는 단추 안쪽 시접 단이 늘 접혀 형편없이 오 그라들어 있다. 앞섶인데도 단추 안에 접혀 가려져 있 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반듯하게 펴려는 다림질 같은 수고를 하지는 않는다.
앞섶일지라도, 굳이 단추를 일일이 풀어헤치지만 않는 다면, 그 형편없는 오그라듦은 끝내 가려져 보이지 않 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 가려져 있으면 그건 자연스 레 잊힐 것이라는 걸, 앞섶의 어색한 안색은 짐짓 기대 하면서 세상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뒷모습이 깔끔해야 해요, 나이 들수록’. 외출하려는 남편의 뒷모습을 살폈다. 옆으로 쏠린 뒷머리 가락을 손가락 빗질로 다듬고, 코트 깃과 목도리를 가지런하게 펴주고, 얼음길을 걱정하며 마당까지 따라나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살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보다는 앞모습을 더 많이 바라보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의 시선 속에 살아가면서, 상대에게 보여지는 앞모습도 경쟁력이라고 여기는 세상이다. 그러나 늘 살피고 돌아보아야 할 것은 뒷모습이다.
‘신이 보고 있지 않은가!’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건축할 때의 일화다.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신전의 지붕공사를 대충 마무리하여 지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절절한 외침으로 부실시공 계획은 무산되었고, 파르테논 신전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지붕 구석구석까지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뒷모습은 훨씬 더 중요하다.
단원 김홍도(1745-1806)는 생의 마지막 무렵에 이르러, 염불하며 서방정토로 향하는 스님이란 뜻의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를 그렸는데, 세상의 백팔 번뇌를 모두 내려놓고 연좌에 앉아 고요히 서방정토를 바라보는 듯한 늙은 스님의 뒷모습을 그렸다. 뒷모습은 우리 내면의 거울인 까닭에, 단원은 늙은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깊은 내면의 성찰’에 도달하도록 하고 싶었나 보다. 인간의 보이는 얼굴은 하나지만, 보이지 않고 감춰진 얼굴은 셀 수 없이 많기에 겉모습만으로는 뒷모습을 알 수 없다. 중국 최고의 가면 술인 ‘변검(變臉)’은 소매로 얼굴만 스치면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뀐다. 최고 변검 술의 고수는 24개까지의 얼굴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한다. 현실에서도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상황에 따라 얼굴을 수시로 바꾸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해양 소설가이자 시인인 오어선장은 남태평양 원양어선에서 고기를 잡아 올리는 어부들의 뒷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리곤 한다. 그물을 끌어 올리는 어부의 뒷모습에선 어떤 위선도, 가식도 보이지 않는다. 버려진 종이박스와 폐휴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언덕길을 오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 재래시장 장날 못난이 채소를 팔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청년 농부의 뒷모습, 젊은 날 꽃집에서 산 연꽃 세 송이 앞에서 두 손으로 합장 기도하고 지나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에선 인간의 실존적 진정성이 가득했다.
“앞섶을 그럴듯하게 가다듬는 일이, 뒤태 단정한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있다. 뒷/모습 따윈 그들 사전에는 없다. 진실이란 그들에겐 위/선과 일심동체이자 불이(不二)인 까닭이다. 매무새나/채비란 전진하는 그들로선 오로지 앞쪽에만 존재하는/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신념으로 증폭된 위선. 그건 그들의 단호한 앞가림에/서 더 강화되며 진화한다. 예컨대 그 방향은 불가역의/영역이다.”라는 시인의 말을 곰곰이 새겨보는 시절이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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