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처음 만나는 세상

홍사라 | 기사입력 2025/03/05 [13:52]

[홍사라의 풍류가도] 처음 만나는 세상

홍사라 | 입력 : 2025/03/05 [13:52]

  © 홍사라

 

새벽 네 시 반. 띠디 띠디 띠디.. 알람이 울린다. 

 

졸음이 가득 담긴 꾹 감겨있는 눈을 간신히 띄워, 실눈을 만든 뒤 알람을 켜고 휴대전화를 본다.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열어 오늘은 한라산을 오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정까지만 해도 기상악화로 통제가 되었었는데, 아침에 확인해보니, 부분통제로 바뀌어 있었다. 일부 통제가 해제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자 잠이 확 달아났다. 

 

몸을 일으켜 어제 싸다만 짐들을 다시 챙긴다. 여분의 옷도 챙기고 간식이며 따듯한 물이며 이것저것 챙기고는 깜깜한 밤에 차를 몰고 한라산 탐방로 입구까지 이동한다. 도착하니 새벽 6시. 아직 깜깜하지만, 곧 동이 트여올 거다.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탐방로 입구로 이동한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주민등록증과 예약큐알코드를 보여주고 나면 드디어 한라산 입장. 최근에 새로 생긴 나의 루틴이다.

 

등산을 좋아하냐고? 아니, 나는 등산할 때 느껴지는, 허벅지와 종아리가 불탈 것 같은 통증을 아주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산은 좋아해서 완만한 둘레길은 몇 시간이라도 걸을 수 있지만, 오르막이 있는 산은 아주 질색이다. 대학 때도 선배들이랑 등산을 가면 늘 제일 마지막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올라갔던 게 나다. 등산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모습이 부러워 운동 삼아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막상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이 힘든 걸 왜 하지’ 싶어 다시 둘레길로 돌아갔다. 등산을 하다보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 같이 힘든데, 이걸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 때문에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자칭 둘레길 마니아라 둘러대기도 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그래, 내 얘기다. 등산은 갈 생각조차 하지 않던 내가 갑자기 둘레길도 아니고,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다는 한라산을 일주일에 한 번씩 갈 줄이야. (심지어 나는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걸 한번 오르고 나서야 알았다) 나도 내가 놀랍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그 묘한 풍경에 심하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제주인데도 기온이 영하권을 맴돌고 찬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들이 이어졌다. 너무 추워서 산책도 힘들고, 꼼짝없이 집에서 강아지들과 지내다보니 답답해졌다. 원래도 역마살이 심한 나는 나갈 궁리를 하다가 지난번에 끝까지 가지 못한 곳이 생각났다. 얼마 전에 막내가 잠깐 제주에 왔을 때 가족끼리 한라산에 소풍 삼아 간 적이 있었다. 한라산을 볼 수 있는 여러 코스 중 가장 쉬운 코스를 올라갔는데, 설산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평소 외출하듯 그저 따뜻하게만 입고(=대충 입고) 산에 올랐다.

 

짧은 코스라기에 별 생각 없이 간 거다. 아이들도 쉽게 오른다는 후기에 조카까지 데리고 간 우리는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준비 없이 뭘 모르고 온 건지. 초콜릿이랑 먹을 거만 잔뜩 싸서 갔던 우리는 몇 개 먹지도 못하고 너무 추워서 중도 포기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싸서 간 라면을 차 안에서 먹었음은 물론이다. 하하. 그래도 잠깐이었지만 그날 본 설산의 그 풍경은 참 멋졌다. 끝까지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래, 거기에 가보는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등산을 시작하자마자 내려온 셈이니 힘들지도 않았고, 그래서 내가 등산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생각이 난 김에 그곳에 다시 가보려고 하니 기상악화로 인해 통제되어서 오를 수가 없단다. 할 수 없지. 꿩대신닭이라고 그다음으로 쉽다는 코스로 가보자 싶었다. 이래저래 검색해보니 성판악 코스가 어렵지 않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등산 좀 한다는 사람들 기준이었다) 좋았어! 위아래 기모 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긴 패딩을 입고 집을 나왔다. 간단한 먹을거리만 챙겨서 아이젠을 들고. 유난히 추운 날이었고, 눈발도 날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떠난 길이었다. 어차피 백록담으로 가는 마지막 코스는 폭설로 모두 통제되어 있어 중간까지만 갔다가 내려오면 되니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운 좋게도 딱 한 자리가 남아 그 자리에 주차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몰랐다)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엄청나게 쌓여있던 눈에 깜짝 놀랐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데 눈을 헤치고 가야 하니 힘이 배로 들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그나마 오르막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걷고 나니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구간이 4킬로가 넘는 구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힘도 다 빠졌는데 앞을 보니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헉헉거리면서 한참을 올라가는데 고도가 높아지니 날리는 눈발이 거세져 계속 얼굴을 때려서 따가웠고, 바람은 지상이랑은 비교도 안되게 세졌다. 게다가 내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이래저래 힘든데 오르막도 심해지니 점점 ‘아, 이게 아닌데.. 내가 미쳤지, 여길 왜 온 거냐….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하는 불평이 마음속에서 터져 나왔다. 결국,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사라오름만 보고 내려오는 것으로 코스를 바꾸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으로 오르는 코스 중간에 사라오름이라는 곳이 있는데, 중간에 잠시 갓길로 빠져나와 사라오름을 구경할 수 있는 코스였다. 처음인데 무리하지 말자는 나름의 절충안이었다.

 

사라오름 입구가 보이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킬로도 되지 않는 길인데 경사가 얼마나 심한지(내기준이다) 열 번도 넘게 쉬어가며 올라갔다. 오름 천지인 제주에서, 힘들어 죽겠는데 이걸 뭐하러 보나 싶어 그냥 내려갈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씩씩거리면서 기를 쓰고 올라가던 중이었다. 더 못가겠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 갑자기 오르막이 끝나고 주변의 나무들이 사라지더니 눈앞에 평야가 펼쳐지는데, 우와…. 그때의 그 감정은 말로 표현이 어렵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엄청나게 심한 눈보라가 날리고 있었고, 어디가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할 수도 없이 온통 회색빛에 상고대가 가득한 나무들만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지만, 가시거리가 짧아 잘 보이지도 않으니, ‘여기가 지구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내가 화성쯤에 서 있는 줄 알았다. 그만큼 멋진 장관이었다. (고작 이런 단어로 표현하기에 미안할 정도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 소리와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전부였다. 핸드폰이 꺼질 정도로 추운 데다, 생전 처음 맞아보는 센 바람에 온통 구름이 가득한 날씨라 오르는 데 정말 힘들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멋진 풍경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사라오름에 올랐지만, 그날 봤던 그 풍광이 잊히질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명산들이 많겠지만, 이런 광경은 한라산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한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심심하면 산이나 오름에 간다. 막상 같은 곳에 여러 번 올라보니 매번 그날 날씨에 따라 ‘여기가 같은 곳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자주 가도 지겹지가 않다. 오름은 산에 오르기 위해 워밍업으로 다니고, 한라산신님이 허락해주시는 날 한라산에 오른다.

 

(한라산은 날씨 때문에 겨울에 자주 통제가 돼서, 가고 싶다고 갈 수 있고,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라산신님이 허락해 줘야 볼 수 있는 거란 우스갯소리가 그래서 나온 거다) 사람들만 만나면 한라산, 그것도 겨울 설산을 무조건 꼭 가보라고 한다. 힘들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겨울 한라산은 정말 너무 멋지다고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이 요즘 내게 하는 안부인사가 “여보세요? 또 산에 갔어? 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고도 묻는다. 그럼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네가 못 봐서 그래.’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설산, 한라산. 

 

이제는 고사리 장마로 날씨도 따뜻해지고 비도 많이 내려서, 눈이 많이 녹아 예전 같지 않겠지만, 한 번쯤 꼭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계절이 지나가는 게 아쉬웠던 지난날과 달리 언제부턴가 계절이 변하는 것에 무감각해졌었는데 이제는 막 지나간 겨울이 그새 기다려진다. 추운 걸 질색하는 나인데도, 눈밭에 발이 푹푹 빠져가며 그 추운 날 눈발에 볼이 빨개져서 걸었던 그 길이 무척이나 그립다. 얼른 시간이 지나 그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아마 누군가 제주에서 무엇이 제일 좋았느냐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겨울 한라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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