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라의 풍류가도] 너의 겨울 투쟁기

홍사라 | 기사입력 2025/04/03 [16:05]

[홍사라의 풍류가도] 너의 겨울 투쟁기

홍사라 | 입력 : 2025/04/03 [16:05]

  © 홍사라

 

올봄은 이상기후로 시작했다.

 

영하를 넘나드며 눈발이 날리는 날씨에서 다음날은 갑자기 영상 10도를 웃도는 날씨로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고 오락가락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 반복되며 봄으로 향하고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꺼운 외투를 입었다 벗었다, 도통 겨울 외투들은 언제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하는 것인지, 드라이를 맡기려고 챙겨두었던 옷을 다시 꺼내어 입기 일쑤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겨우내 점점 메말라가던 작은 텃밭에 사는 식물들의 성장세가 빨라진다. 계절은 나보다 우리 집 마당의 식물들이, 처마 밑에 사는 제비가 늘 먼저 알아채고 다음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데, 생각보다 둔한건가. 나는 헷갈리는데 어떻게 봄이 오는걸 아는 것인지, 겨울 동안 손톱만큼도 자라지 않던 나무들이 그 끝에 연한 연두색 잎을 올리기 시작한다. 일 년 중 이때만 볼 수 있는 여리고 여린 연두색. 어제 동생과 산책을 하는데 구름나무(나는 사철나무를 그렇게 부른다.) 끝마다 올라온 새잎들을 보면서 “나는 이 색이 그렇게 예쁘고 좋아.” 하더라. 그만큼 곱게 봄을 맞이한다.

 

봄은 겉보기에는 참 부드럽다. 그런데 나는 봄이 그 어느 계절보다 강해 보인다. 

 

작년 제주로 오면서 몇 가지 실험을 해봤다. 텃밭에 각종 허브를 심어 겨울을 날 수 있는지 확인해보기. 서울에서는 겨울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허브들은 다 죽었다. 매서운 칼바람과 혹독한 날씨 때문이겠지. 서울보다 제주는 겨울 평균온도가 높으니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년 봄 여러 허브나무를 심었다. 라벤더, 로즈마리, 세이지, 세인트 존스워트 등, 약으로, 차로 쓸 수 있는 많은 허브를 서울에서 가져와 심어놓았다. 그런데 이번 겨울, 제주 날씨는 심상치 않았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들이 이어지기 일쑤였고, 폭설도 자주 내리고, 무엇보다 제주의 겨울바람은 상상 이상이어서 심어놓은 대파들이 45도 각도로 늘 누워있을 정도로 춥고 강했다.

 

너무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목대에 뽁뽁이도 감아주고, 비닐로 바람도 살짝 막아보고 했지만, 바람이 한번 불면 어디론가 휙 날아가 다시 추위에 노출되기가 일쑤. 초보 농사꾼에게 겨울을 상대하는 건 좀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겨울을 나고 지금, 며칠 전에 봄맞이 재정비를 해야겠다 싶어 겨우내 방치해 두었던 허브들을 확인해보았는데, 다행히도 반 정도는 살아있었다. 잎도 다 갈색으로 바래고 끝이 말라서 죽은 것 같이 보였지만, 밑동에서, 아래 가지에서 작은 싹들을 올리고 있었다. 급하게 죽은 가지들을 가지치기해 정리해주고 또 며칠이 지나니 여기저기 돋아나는 싹들이 더 많이 보인다. 신기해라. 겨우내 잘 나지 않던 향도 점점 더 강해지고, 허브 나무들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을 가지고 있어서 실외에서 식물을 키우거나 조경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계절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식물들을 보면 인간인 나보다 참 낫다 싶을 때가 많다. 티트리라고 항균 기능이 뛰어나 화상이나 감염, 여드름 등을 치료하는데 많이 쓰이는 허브가 있다. 작년에 그 나무도 하나 심었는데, 눈의 많이 오고 추위가 심한 날이 지속되다 보니 위쪽의 잎들이 다 말라버려서 갈색이 되있었다. ‘아, 죽겠구나...’ 생각했지만 혹시 몰라 죽은 가지들을 다 잘라내고 앙상해진 나무에 물을 주며 며칠을 기다려봤다. 어제 나가 확인해보니 몇 개 되지는 않지만 아주 작은 잎사귀들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살았구나!” 겨울을 잘 지내고 살아남아 주어 기쁘고 반가웠다.

 

나무는 가을이 되면 스스로 낙엽을 만들어 바닥에 떨군다. 나무가 스스로 겨울을 대비하는 한 방법이다. 건조해지는 겨울, 잎을 통해 나무의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잎의 기공을 닫고, 떨켜(잎이 떨어진 자리를 코르크화해서 수분 증발을 막고 미생물의 침입을 방어하는 조직, 온대 기후에서 자란 나무는 떨켜를 만들지 않는다)라는 특별한 조직을 생성한 뒤 잎을 떨어뜨린다. 또 나무 내부의 전분을 설탕으로 바꾸어 물의 어는 점을 낮춰서 기온이 낮아질 때 나무 속의 물이 어는 것을 막기도 한다. 여름부터 매서운 추위에서 살아남으려고 겹겹의 비늘잎으로 겨울눈을 만들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여러 방면으로 나무만의 방한 장비들을 만들어 낸다. 나의 티트리나무도 아마 이런 과정들을 통해 추웠던 지난겨울을 견뎌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속에선 겨울을 나기 위해 정말 많은 일의 일어났고, 그로 인해 나무는 무사히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평온해 보이기만 하던 겉모습 속에는 발이 바쁜 백조처럼 정신없는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삶에 적용해 배울 것이 참 많이 있다. 어떨 때는 사람의 생각보다 더 영리하고, 지혜로워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에서, TV에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던 이야기.

 

“인생은 참 맘대로, 계획대로 되질 않아,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날 올지 모르거든.”

 

좋다, 나쁘다. 이렇게 한쪽으로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살아보니 인생은 정말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방향을 틀어야 하고, 또 때로는 아예 손을 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때를 알고 그 때에 맞추어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나무처럼, 그렇게 상황을 유연하고 현명하게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으스댈 것도, 나쁜 일이 있다고 전전긍긍할 것도 없다. 모든 시간에는 끝이 있고, 그 뒤엔 늘 다음이 있으니까. 이상한 날씨지만, 분명 봄은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런 날 산길을 걸으며 나무들의 ‘겨울 투쟁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나의 겨울 투쟁기도 나누면서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보면 사람보다 한 수 위인 그들의 지ᅙᅨ를 조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홍사라

전형적인 이공계생의 머리와 문과생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음악과 미술, 동물과 책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다르게 꽃과 공간을 다루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해 호텔에서 ’꾸미는 사람‘으로 오래 일했고, 세계 최초의 플로리스트 협회이자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AIFD(American Institute of Floral Designers)의 멤버이다.

꽃일을 하는동안 있었던 일들을 ’꽃 한 송이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꿈꾸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추구해야 할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독한 ’풍류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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