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준 칼럼] 메이지유신의 성지, 가고시마를 다녀오다

박항준 | 기사입력 2025/04/07 [10:39]

[박항준 칼럼] 메이지유신의 성지, 가고시마를 다녀오다

박항준 | 입력 : 2025/04/07 [10:39]

역사를 배우되, 역사에 갇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요시다 쇼인》, 《국화와 칼》을 읽으며 이노비즈 독서토론회 회원들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다각도로 토론해왔던 우리는, 작년 메이지 유신의 중심지였던 조슈번, 지금의 야마구치현 하기(萩)를 찾은 데 이어 올해는 또 다른 주역인 사쓰마번의 본거지, 가고시마로 두 번째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정은 도자기 전문가 조용준 작가와 함께한 특별한 탐방으로, 일본 근대화의 감춰진 기원과 우리 역사 속 아픔이 교차하는 땅을 직접 밟으며 깊은 성찰을 나누는 자리였다.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제도 개혁의 결과가 아니라, 오랜 준비와 에도 막부 체제의 균열, 그리고 은밀한 축적의 결과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는 기존 역사 교과서나 주류 학자들이 간과했던 관점을 새롭게 마주하게 되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끌려온 조선 도공들을 활용해 백자와 도자기 기술을 습득했고, 이를 부가가치 높은 상품으로 상업화해 유럽에 수출하며 막대한 자금을 축적했다. 이들은 에도 막부 몰래 영국 상인 토마스 글로버를 통해 군함과 스펜서 총을 들여오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길렀고, 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격변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 조선 중기의 백자(좌)와 일본의 유럽 수출용 백자(우)

 

사쓰마번의 중심지 가고시마에서 우리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의 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조슈번과 동맹을 맺고 보신전쟁을 이끌며 막부군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자, 이후 근대적 육군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정한론을 주장하며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끝내 세이난전쟁에서 반정부군을 이끌다 시로야마의 동굴에서 자결했다.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끌려온 조선 도공들은 사쓰마 도자기의 기반을 이뤘고, 일본 사무라이 문화와 융합되며 유럽 시장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그 후손들 중 아직까지도 도예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도예가가 15대 심수관이다. 또 다른 피랍 도공 박평의의 후손인 박무덕의 이야기는 역사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박평의는 일본 가고시마현 미야마 지역에 정착해 사쓰마야키 도자기 제작에 기여했으며, 그의 가문은 도자기 사업을 통해 사족 신분에 올랐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평민으로 전락하자, 그의 후손 박수승은 도공의 삶을 끊고 도고(東鄕) 성의 족보를 사들여 사족의 지위를 유지했고, 그의 아들 박무덕은 어릴적 도고 시게노리로 개명했다. 성장한 박무덕은 전시 일본의 마지막 외무대신이 되었고, A급 전범으로 20년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의 위패는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어 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국 일본의 외무수장이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이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얼마나 날카롭고 복합적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유신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태어난 사무라이의 거리, 가치야마치도 찾았다. 이 지역에는 사쓰마번이 영국 해군과 벌였던 사츠에이 전쟁의 기념비가 서 있으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전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묘소도 자리한다. 그는 생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조선의 수군을 이끈 이순신 제독입니다”라고 밝혔던 인물이다.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한 가장 깊은 통찰은,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갖고도 기술자를 천시하고 상업화에 실패한 채 일본에 시장을 빼앗기고, 결국 나라까지 잃었던 우리 자신의 역사다. 그것은 단지 외세 탓만이 아니라, 기술과 자원을 갖고도 그것을 시대의 흐름과 수요에 연결하지 못한 내부의 무기력과 오만의 결과였음을 깨달았다. 메이지유신이라는 남의 나라 혁신을 배우러 왔다가 우리 스스로의 혁신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격전지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혹시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최고의 기술을 무시하고, 도외시하고, 부족한 점만 부각해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거 우리가 미래의 먹거리로 삼았던 줄기세포 기술이 ‘황우석 사태’로 무너진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상온 초전도체 기술이 조롱을 받던 바로 그때, 해외에서는 그것이 초전도체가 아닐지라도 새로운 물질일 가능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친일파에 갇히고, 빨갱이에 갇히고, 좌파와 우파, 독재와 학살의 상처에 갇혀 산다. 그로 인해 세대가 갈리고, 친구가 갈리며, 지역이 갈리고, 심지어 아버지와 딸, 아내와 남편, 형제들마저도 서로 갈등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공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되, 역사에 갇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메이지 유신을 부러워하거나, 대한제국 시기 우리 조상들의 부족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도자기 기술이 무엇이며, 그 기술에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로 확장시킬지를 고민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배워야 할 유신(維新,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이다.

 

박항준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반려가족누림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한국디지털웰니스협회 부회장

디케이닥터 대표이사

누림경제발전연구원장

기술거래사/기업기술가치평가사

공)저서. 더마켓TheMarket / 스타트업 패러독스 / 크립토경제의 미래

좌충우돌 청년창업 / 블록체인 디파이혁명 / CEO의 인생서재

/ 이노비즈 CEO독서클럽 선정도서 21選 (사회관 편) (세계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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