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봄길 / 정호승

서대선 | 기사입력 2025/05/19 [13:06]

[이 아침의 시] 봄길 / 정호승

서대선 | 입력 : 2025/05/19 [13:06]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유년의 갈라파고스로 길을 내어 골목길마다 열어보게’. 남편이 대학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제자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먼 길을 달려와 어린 학생처럼 다소곳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 가슴에 담는다. 육십도 훨씬 넘은 제자는 직장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홍천에서 천체 망원경으로 밤마다 별들을 만나며 시의 길을 찾고 있다고 했다. 봄비가 길을 막는 날, “스스로 봄길이 되어” 스승을 찾은 제자의 모습에선 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제자 황상(黃裳, 1788-1870)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다산(茶山)이 유배지 강진에서 서당을 열었을 때, 유독 말수가 적고 명민해 보이는 소년에게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소년은 대답 대신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라고 주뼛거리며 물었다고 한다. 자신은 머리도 둔하고, 앞뒤가 꽉 막혔으며, 깨달음도 느려 답답하다며 고개를 떨구는 소년에게 다산은 ‘삼근계(三勤戒)’를 들려주었다. 민첩하게 금세 외우고, 예리하게 글을 잘 짓고, 깨달음이 재빠른 사람은 오히려 그것에 자만해 공부를 게을리하게 된다.

 

그러기에 너 같은 아이가 비록 속도는 늦을지라도 한번 문리(文理)를 터득하면 더 큰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고, 또 너라야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갖고 부지런, 또 부지런해야 한다고 격려해 주었던 제자 황상은 서두르지 않고 묵묵하게 정진하였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느냐’며 말끝을 흐렸던 열다섯 살 황상의 시(詩)는 다산의 두 아들을 통해 서울의 문인들에게 소개되었으며, 황상의 나이 오십도 훨씬 넘은 나이에 그 명성이 자자해졌다. 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재상을 지낸 권돈인(1783-1859)을 비롯해 당대 명망 있는 문인들이 그와 교류하고 싶어 했다. 특히 추사는 제주에서 유배가 해제되었을 때, 집으로 올라가던 도중 강진으로 걸음을 옮겨 황상을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으며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제자는 대학생 때 대학신문 학술상 시 부문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서의 싹을 보였다. 그러나 졸업 후 신문사 기자로 취업하면서 사회 속으로 뛰어든 제자는 산문형의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마을을 찾아다니며, 우리 삶의 터전인 ‘마을’ 이야기를 담아낸 ‘대한민국 마을 여행’이란 저서를 펴내기도 했던 제자는 기자의 삶을 마치고, 강원도 홍천 자신의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만나며 끊겼던 시의 길을 내고 있다. 오로지 시의 길만을 자신의 숙명처럼 여기는 선생님을 찾아뵙고, 황상의 자세로 정진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 든 제자는 대학 시절 이후 끊어졌던 ‘시의 길’ 위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봄비 내리는 먼 길을 달려와, 온 마음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는 육십 넘은 제자와 시(詩)만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아는 스승의 모습 속에 “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향기가 느릅나무 속잎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seodae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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