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백의종군에서 살린 사람, 3명의 왕을 섬기며 40년 재상직책을 수행한 사람, 대동법을 제안한 사람으로 알려진 오리 이원익은 애민(愛民)이라는 가치를 향해 평생을 실천으로 살아낸 조선의 행정가였다. 그는 단순히 정치를 ‘운영한 사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권력을 ‘견딘 사람’이었다. 가난한 백성의 삶을 눈물로 바라보던 그는 다스림보다는 섬김을 택했다. 섬김이란 강자의 은혜가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정치는 화려하지 않았고, 언변은 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선택은 명확했다. 나라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고, 그 중심은 언제나 ‘백성’이었다. 당파로 나라가 분열되던 혼란의 시기에도 그는 결코 편을 가르지 않았다. 편이 아닌 ‘공정’을 택했고, 자신의 자리를 위한 정략보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줄 ‘실용’을 앞세웠다. 그래서 그를 두고 ‘모두가 존경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정파를 넘어 그를 신뢰한 이유는 그의 태도가 일관되었기 때문이다.
오리 이원익은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 의견을 포용함으로써 조화를 이뤘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겸손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공동체를 높이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임을 그는 시대보다 앞서 깨닫고 있었다. 그의 권위는 지위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의 영향력은 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그의 삶, 그리고 그 삶을 관통하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동법은 단지 제도 개혁이 아니었다. 백성의 고통을 데이터로 읽고, 불합리를 구조로 바꾸려는 과학적 설계의 정치였다. 그것은 이상주의가 아니었고, 탁상공론도 아니었다. 그것은 행정의 본질이 ‘현장에 있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만든 결과였다. 그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3대의 왕을 섬기며 한결같은 자세로 조정을 지켰다. 그러면서도 퇴직 후에는 기와집도 아니고 초가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어떻게 가난하게 죽을 수 있는지, 그는 그것조차 가르쳐주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동인에서 분파한 남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서인 정권에서도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인과 남인의 연립 정권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국정 개혁을 주도한 명재상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인조반정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며 조선의 국난 극복과 민생 안정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후대에 도산 안창호를 떠올리게 한다. 권위보다 인격, 권력보다 양심, 당파보다 공공, 행동보다 더 강한 침묵의 무게. 두 사람은 시대가 달랐지만, 닮아 있었다. 조율과 협력을 바탕으로,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꿈꾸었고,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단련했다. 말로 사람을 설득하기보다, 행동으로 신뢰를 쌓았고, 자신을 먼저 바꾸어 세상을 바꾸려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법(法)보다 마음이고, 정책보다 철학이다. 이원익은 그것을 남겼다. 청빈과 양심, 애민과 긍휼의 마음을, 어떠한 이익과 당파에도 흔들림 없이 실천했던 한 사람. 오늘날의 정치가와 리더가 반드시 비추어야 할, 시대를 초월한 거울이다.
박항준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반려가족누림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한국디지털웰니스협회 부회장 디케이닥터 대표이사 누림경제발전연구원장 기술거래사/기업기술가치평가사 공)저서. 더마켓TheMarket / 스타트업 패러독스 / 크립토경제의 미래 좌충우돌 청년창업 / 블록체인 디파이혁명 / CEO의 인생서재 / 이노비즈 CEO독서클럽 선정도서 21選 (사회관 편) (세계관 편)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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