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학자 임병식의 도닥거림] 길이 없을 때, 시작되는 길

임병식 | 기사입력 2025/09/04 [09:47]

[죽음학자 임병식의 도닥거림] 길이 없을 때, 시작되는 길

임병식 | 입력 : 2025/09/04 [09:47]

아포리아(aporia), 그리스어로 ‘길이 없음’ 또는 ‘막힘’을 뜻한다.

 

사람들은 흔히 길이 없다고 하면 좌절을 떠올린다. 더 나아갈 수 없고, 더 할 말이 없는 상태. 그러나 철학자들은 그 길 없음에서 새로운 사유의 시작을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은 늘 그렇게 끝난다. 수많은 질문이 오가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답은 무너지고, 참여자들은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곤경 속에 선다. 그 막힘, 그 아포리아에서 철학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삶 자체가 아포리아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죽음을 결코 경험할 수는 없다. 죽음을 말하려 하지만, 언어는 자꾸만 미끄러지고 멈춘다. 말할 수 없음 속에서, 우리는 그저 침묵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바로 그 침묵이 아포리아다.

 

데리다는 말했다. 아포리아는 풀리지 않는 모순이라고. 그러나 바로 그 모순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죽음을 둘러싼 아포리아도 그렇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곁에 서야 한다. 위로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 불가능이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윤리다.

 

오늘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상실의 고통, 죽음의 침묵, 관계의 단절은 우리의 언어와 이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아포리아가 우리를 멈추게 하고, 우리를 더욱 성찰하게 한다.

 

삶에서 누구나 길을 잃는다. 사랑을 잃고, 관계가 끊기고,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길 없음의 벽 앞에 선다. 그러나 그 막힘이 곧 끝은 아니다. 아포리아는 멈춤이면서 동시에 다른 길의 시작이다. 길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새로운 길이 열린다.

 

죽음학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치유란 모든 상처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칠 수 없는 것을 함께 견디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아포리아는 치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길 없음에 머무르는 용기, 그 자리에 함께 서 있는 누군가의 존재. 그것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

 

길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본다.

길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길은 없지만…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임병식

철학박사.의학박사

한신대 휴먼케어융합대학원 죽음학 교수

한국싸나톨로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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