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YS-JP 막전막후 지원(협력) DJ정권 탄생 비화

3김의 세기적 협력을 통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최병국 기자 | 기사입력 2019/08/06 [17:12]

[그날] YS-JP 막전막후 지원(협력) DJ정권 탄생 비화

3김의 세기적 협력을 통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최병국 기자 | 입력 : 2019/08/06 [17:12]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였다. 애증의 세월을 함께 하였던 YS-JP의 막전 ∙막후 협력을 통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낸 한편의 장엄한 심포니(Symphony)였다. 

 

YS에게 버림을 당해 자민련을 창당한 JP의 ‘박정희 대통령이 DJ에게 진 빚을 갚겠다’라는 신념의 정치 행위와, ‘이회창 집권 시 사법처리 될 것이다’란 YS의 직관의 정치행위가 결합해 YS-JP의 막전 막후 협력을 통한 DJ정권 탄생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로 인해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및 역사적인 남북화해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YS-JP의 막전막후 협력을 통한 DJ정권 탄생의 비화 등을 살펴본다.

 

문민정부 탄생, 

DJ 정계 은퇴와 (번복) 복귀 

이후 3김의 합종연횡

 

박정희·전두환의 철권 통치시대 김영삼·김대중은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양인은 오랜 세월 협력과 경쟁의 숙명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민주화를 공동으로 일궜다.

 

민주화 이후 양인의 분열로 1987년 12월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에게 어부지리 당선을 안겨주었고, 1992년 12월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막판 정주영 후보 측에서 터트린 초원복국 사건의 역풍으로 영남권의 결집이 이뤄지면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8.2% 차이로 여유 있게 당선됐다. 직후 김대중 후보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1월 26일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출국 후 약 6개월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원 생활을 하다 그해 7월 귀국하여 활로 모색 중, 1994년 영원한 동교동 집사인 이수동 및 핵심측근 임동원 등이 주축이 되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여 정치재개를 예고했다. 1995년 7월 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고, 그해 12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 대선 행보를 본격화했다.

 

1990년 2월 3당 합당을 선언하여 김영삼 정부 탄생에 이바지한 김종필은 김영삼 직계세력들의 견제로 버림당할 것을 예견하여, 1995년 2월 탈당하여 자민련을 창당했고, 1996년 4월의 제15대 국회 의원선거에서 50석을 확보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이후 1996년 5월 26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4·11 총선 민의수호 결의대회’에 참석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동시 참석하여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인사한다. 신 3김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합종연횡의 서막이었다.

 

제15대 대선을 향한 신한국당의 9룡 쟁투 및 DJP 연합전선 결성

 

1996년 12월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하여 정국이 요동치는 가운데, 1997년 신년 벽두부터 대선정국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김영삼 직계였던 최형우 의원이 그해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충격 속에 신한국당 내 9룡의 쟁투가 시작됐다.

 

이회창, 이인제, 이한동, 김덕용, 이수성, 최병열, 박찬종, 이홍구, 김윤환 등 9명이 출사표를 던졌고, 6월 4일부터 경선이 시작되어 7월 21일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후보가 선출됐다. 전당대회 진행 과정에서 이인제, 이한동, 김덕용, 이수성 4인이 反이회창 연대를 결성했고, 이회창 후보가 경선 중에도 대표직을 유지하려 하자, 타 후보들은 경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강력히 항의하는 바람에 이회창 후보가 6월 30일 후보 등록 직후 대표직을 사퇴했다.

 

7월 21일 이회창 후보 선출 직후,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이 불거져 정치 쟁점화 됨으로써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쳤고, 이로 인해 후보사퇴 요구 및 이인제 독자 출마 움직임 등, 신한국당은 내홍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신한국당의 이런 쟁투와는 별도로, 새정치국민회의는 5월 19일 서울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김대중 총재를 후보로 선출했다(득표율 77.5%). 이후 6월 24일 자민련은 대통령 후보자 선출 전당대회에서 김종필 총재를 후보로 선출했다(82.3%).

 

이후 김대중 후보 측은 선거 승리를 위한 DJP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JP와의 연합을 결심하고 구애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킨다. 김대중 후보 측으로부터 연합정부 구성을 제의받은 김종필은 자신이 스스로의 힘을 통해 대권을 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김대중과 함께 공동 정권을 창출을 결심하기 시작한다(사실 1996년 4월 총선 직후 김대중의 정치 참모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이 김종필과 손을 잡아야만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일명 'DJP 연합' 초안에서 출발하였고, 김종필 측과 1년이 넘게 의사 타진 과정을 거쳤다).

 

이런 과정에 김대중은 김종필의 마음을 확실히 붙잡기 위해 박태준 영입에도 공을 기울인다. 그래서 김대중은 1997년 9월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 관전 명분을 내세워 일본을 방문하여 박태준과 연합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여 연합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기도 했다. 이렇게 진행된 DJP 연합은 1997년 11월 3일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의원의 청구동 자택에 직접 찾아가 마무리했고, 다음날 공동발표를 통해 국민에게 알려졌다. 충청·보수층을 김대중 후보 측으로 견인시켜 DJ 승리를 일구어내려는 JP의 막전 작전이 총성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이회창의 집권만은 막겠다’

결기 어린 김영삼 대통령의 막후 역할

 

DJP(T) 연합전선 구축으로 본격적인 대권행보(1997. 11. 4∼ )를 시작한 김대중 후보의 행보와는 달리 신한국당의 사정은 마치 침몰해가는 함선처럼 요동쳤다.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 비리 의혹으로 지지율이 10%대로 폭락하는 가운데, 이인제 의원이 이회창 후보 퇴진을 요구하다, 1997년 9월 13일 탈당을 선언했고, 10월 10일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총재 이만섭). 

 

3파전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이회창 후보 측은 10월 중순 강삼재 총장을 시켜 김대중 후보가 친·인척 명의로 670억 원의 비자금을 숨겨 놓았다고 폭로하면서,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요구했으나 김태정 검찰총장과 박순용 중수부장 등 검찰 수뇌부가 수사유보 결정을 하자,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의 결정이라면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면서, 3김 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회창 후보와 김영삼 대통령의 갈등이 폭발지점을 향해 서서히 달구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3일 경북 포항에서 진행된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위한 필승결의대회에서 김영삼을 상징하는 03인형이 바늘로 찢기고, 김영삼(인형)을 화형에 처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이에 충격받은 김영삼이 다음날 곧바로 탈당했고, “(패륜아) 이회창의 집권만을 절대 막겠다”라는 결기를 극비리에 내비치면서, 조직의 귀재인 복심 서석재를 탈당시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측에 합류시키기도 한다.

 

이런 파동 속에 1997년 11월 7일,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조순 민주당 총재를 초대 총재로 하고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변경하는 신당(합당)을 발족시켜 선두주자인 김대중 새천년국민회의 후보를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한다. 선거 과정인 11월 21일, ‘정부가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는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자 이회창 후보는 다시 한번 김영삼 대통령을 보는 앞에서 궁박한다. 

 

이회창 후보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 정치적 양자로 소문난 이인제 후보의 완주를 강하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치 스승의 요청에 이인제 후보가 완주로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인제 사퇴는 이회창의 당선을 의미하기에, 김영삼은 이인제의 완주를 독려했고, 김윤환 등 이회창 캠프 핵심들은 선거 며칠 전까지도 이회창에게 ‘이인제에게 당권 및 차기 대권 후보를 약속하고 사퇴를 요청하라’고 주문했으며, 김종필은 이인제 사퇴 시 DJP공조 파기를 결심하면서 상황을 예의주시 했다. 실로 숨 막히는 상황에서 이인제가 완주하여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김영삼의 막후 역할이 실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정부’ 탄생의 정치사적 의미_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후삼국형 정치지형 종식 및‘남북화해시대’개막의 단초를 제공하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10,326,275의 득표(40.2%)로 당선되었고, 이회창 후보는 9,935,718(38.7%), 이인제 후보는 4,925,591(19.2%)표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 2위 간 표차는 불과 390,550이었다(1.6%). 사상 유례없는 혈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진영인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의 합산 득표율을 무려 59.5%였다. JP의 보수·충청권을 향한 선무 작업 및 YS의 이인제 후보 완주독려(추정) 등이 없었다면 DJ의 당선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넉넉히 인정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90년 3당 합당 후 내각제 유출 파문으로 위기국면에서, “내 비록 국민에게 돌에 맞아 죽을지언정 더러운 공작정치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 후 당부를 거부한 김영삼식 분노정치가 이번에는 자당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이라는 대상으로 바뀌어,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 정치적 양자인 이인제 후보의 완주를 주문(추정)한 김영삼 특유의 직관의 정치 행위는 이 나라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DJ는 당선 직후 YS의 선거 중립에 대해 거듭, 거듭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불굴의 민주투사 YS와 늪 속에서 피어난 인동초 DJ 및 자의반 타의반의 풍운아 JP는 50년에 결처 경쟁과 협력을 통해 민주화를 일구어 냈으며, 또 다른 이합집산을 통한 막전, 막후의 정치 행위로 ‘DJ정권’을 탄생시켜 한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하면서 ‘남북화해시대’의 기반 구축에 이바지했다.

 

제15대 대선은 우리나라를 질곡과 분열의 늪 속에서 구출해낸 한국현대 정치사에 찬란한 금자탑이었다. 보수 세력이 강성했던 당시 상황에서 JP의 ‘박정희 대통령이 DJ에게 진 빚을 갚겠다.’는 신념 아래에 DJP 연합전선을 구축한 JP의 혜안 및 ‘이회창의 집권을 막겠다.’는 YS의 결기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장엄한 심포니(Symphony)를 울리면서 탄생시킨 DJ정부의 출범은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병폐인 동·서간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소중한 지렛대를 구축했다. DJ정부의 출범으로 인해 영원한 분열과 갈등의 후삼국형 정치지형도는 마침내 종식되는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이 비로소 구축되기 시작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숙제이던 남북화해시대의 단초가 열리기 시작했다.

 

한국현대사를 이끌던 세기적 풍운아들인 YS·DJ·JP 모두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고 영면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다시 손잡고 이전투구에 몰입하는 일그러져가는 정치풍토를 안타까운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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