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훔치고 싶은 이야기, 연극 ‘도둑맞은 책’

원작 압축·재구성해 밀도 높인 연출, 무대 장악한 두 배우의 균형

이영경 기자 | 기사입력 2016/12/18 [11:33]

[리뷰] 훔치고 싶은 이야기, 연극 ‘도둑맞은 책’

원작 압축·재구성해 밀도 높인 연출, 무대 장악한 두 배우의 균형

이영경 기자 | 입력 : 2016/12/18 [11:33]

이야기라는 것이 이처럼 시시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러나 아마도 역사는 기막힌 꼴들을 보듬으며 진화했을 거고 그때마다 이야기는 인류를 위로하며 맥을 이어왔을 것이다. 더 황당하고 기막힌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렇기에 우리는 천박하지 않고 정신적 무기력에 빠지도록 놔두지 않으며 지적, 감각적 욕구를 채워줄 만한 이야기를 만나야 한다. 이야기를 훔치는 이야기, 연극 ‘도둑맞은 책’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사진제공=(주)문화아이콘)

 

오랜 기간의 침묵을 깨고 흥행 시나리오를 들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 작가 서동윤이 시상식장에서 돌연 사라진다. 정신을 차린 서동윤은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고, 그의 눈앞에 보조작가 조영락이 있다. 휠체어에 묶여 있는 서동윤에게 조영락이 요구하는 것은 시나리오를 쓰는 것.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다른 작가를 죽이고 그의 원작을 훔친다’는 게 아이템이다. 조영락이 강요하면서 완성되어 가는 스토리는, 바로 서동윤이 이야기다.

 

다른 사람을 시시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재능 같은 것은 왜 있는 걸까. 그보다는 왜 나에게 주어지지 않아 비참하기 짝이 없는 질투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걸까. 단 한 편의 문제작을 내놓은 이후 특별한 이력을 만들지 못하고 교수 생활의 위기마저 느끼게 된 서동윤에게 애써 감쳐왔던 그의 무능을 상기시키는 제자 김영희가 나타난다. 비가 내리던 어느 밤, 이들이 술에 취해 고성을 내뱉던 날, 김영희가 죽었다. 서동윤은 김영희의 시나리오를 훔치고 그의 아내도 훔친다. 완벽했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진실이 담겨 있는 쪽지를 받기 전까지는. 카인은 성공적으로 아벨을 제거했는데, 모든 걸 알고 있는 신이 묻는다. 아벨은 지금 어디 있느냐고. 

 

(사진제공=(주)문화아이콘)
(사진제공=(주)문화아이콘)

 

서동윤과 조영락의 공동작업으로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간다. 그 과정을 무대 위에 풀어낸 연극 ‘도둑맞은 책’은 (서동윤의 강의처럼)처음 관객이 이야기에 빨려드느냐를 결정하는 10분이 매력적이고, 너무 진부하지 않고 허무맹랑하지도 않으며,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도 않다. 무기보다 중요하다는 살인 동기도 납득 가능하고, 최고의 순간 뒤에 최고의 위기가 찾아오는 스릴 또한 적당하다. 의무감과 압박감, 두려움 속에서 영감을 좇아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동안 서동윤이 느끼게 되는 전에 없던 희열이 진한 커피, 자욱한 담배연기와 함께 불길하면서도 묘한 기운을 내뿜는다.

 

갇힌 공간 안에서만 진행되는 연극은 필요에 의해 과거 사건들을 끌어오는데, 그 빈도나 장면 선택 및 배치가 적절해 폐쇄된 공간임에도 답답하거나 난잡하지 않다. 무엇보다 불안한 상태의 두 캐릭터가 충돌하는 만큼 서로의 에너지를 치고 받아내는 배우들의 균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리 표현이 예민하지만 오버되지 않았다. 영화 시나리오였던 원작을 영리하게 압축, 재구성해 내면의 굴곡과 서사의 리듬을 매끄럽게 다듬은 연출적 역량이 단 두 명의 배우가 긴장을 유지하면서 극장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원작 유선동/연출·각색 변정주/박호산, 이시후, 강정우, 이규형, 조상웅 등 출연/2016.12.16~2017.02.26/예술극장 나무와 물

 

문화저널21 이영경 기자 lyk@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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