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세검정에 위치한 하림각에서 KBC 홍수환 회장의 타이틀획득 46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현장에는 이경연, 박찬희, 변정일, 지인진 등 세계챔피언을 비롯 2백여명의 축하객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홍회장이 74년 7월4일 WBA 밴텀급 타이틀을 쟁취한지 벌써 46주년이 흘렸다. 조선 27대 임금 평균수명이 46세였고 조선 19대 숙종의 재위기간이 46년이었다. 또한 79년 10.26 사태때 김재규에 의해 삶을 마감한 경호실장인 차지철의 나이가 46세였다.
홍수환 회장은 일전에 한 멘트가 생각난다. 앞으로 남은 30년은 복싱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김형석 교수는 올해 연세가 101살이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75세까지는 성장하니까 제일 행복하고 좋은 나이라고 말한다. 만주전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97세로 생을 마감한 고구려 장수왕 처럼 한국복싱의 부족한 2%를 채우고 시간이라는 모래밭 위에 현역시절처럼 선명한 발자욱을 남기고 떠나리라 믿는다.
동석한 복서 출신의 역술인 박윤수는 “한국 복싱사상 수많은 별중에 가장 빛나는 별이자 가장 영향력이 있는 홍 회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면서 “홍수환 회장이 비포장 도로를 닦아 아스팔트를 펼쳐놓아 후배 복서들이 질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당시에 한국의 대부분의 매니저들은 자기선수의 세계타이틀 교섭권을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이 센 일본의 아라시타와 야마가타 그리고 필리핀의 로페 사례알 등 프로복싱의 복덕방 격인 외국 프로모터에게 소개비를 주고 위임하는 척박한 현실이었다. 이런 과도기에 화려한 쇼맨십과 뛰어난 테크닉을 보유한 홍수환이 등장하면서 그때까지 오랜 영세성 속에 허덕여온 한국 프로복싱이 하루 아침에 최고 인기스포츠로 급부상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복서가 홍수환 이었다.
인상적인 장면은 기념식 행사 중에 홍 회장의 노래를 처음으로 들었는데 듣던 소문데로 수준급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후 나온 옥희 여사의 노래를 듣자 역시 프로는 아마추어와 본질적으로 확연히 격차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복싱에서 프로는 본데로 주먹이 나가지만 아마추어는 친데로 주먹이 간다는 속설처럼 말이다.
기자는 홍수환의 50전 중 가장 극적인 경기는 73년 2월9일 태국방콕에서 거행된 수코타이전을 꼽고싶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는 찜통 더위 속에서 벌인 당시 세계 2위인 수코타이와 지옥의 혈전에서 두 번이나 다운을 당하는 고전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싸워 8회 KO승으로 극적인 대역전승을 끌어낸 경기는 백미였다. 원동력은 강한 잡초근성 바로 그것이었다. 홍수환이 세계최고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여정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재능이란 아무리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도 노력과 근성이 결합하지 않으면 결코 빛을 발휘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사실 홍수환이 첫 타이틀전을 벌일 때 도전자 홍수환은 24살로 32살의 챔피언 테일러를 이기기 딱 좋은 나이였고 3년 후 카라스키야를 꺽고 2체급을 석권 했을때 홍수환은 산전수전 공중전 지하전 까지 치른 46전의 원숙미를 자랑하는 27세의 베테랑 이었지만, 11전에 불과한 카라스키야는 WBA jr 페더급 타이틀을 집어 삼키기에는 너무 어린 고등학교 2학년 나이인 만17세 청소년이었다 이에 홍수환은 겸손하게 럭키(Luck)한 챔피언이라 말했지만 흔희 등산을 할 때 8부 능선이 가장 힘들다고 하듯이 홍수환이 8부 능선에서 여러차례 난적(難敵)들을 잡아낸 경기를 상기시켜보면 우연한 영광은 없는법이다.
200명의 하객 중에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변정일 챔프도 보이고 예산에서 상경한 황해남과 경기도 원당에서 참석한 신두홍, 전직 두 선배 복서도 시야에 들어온다. 이 두 분은 세계챔피언 못지않은 자랑스런 복서다. 현재 서북스카이산업 회장인 신두홍은 복싱인 중에 사업으로 입지를 구축한 대표적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62년 중산체육관에 입관, 63년 서울 신인대회 페더급 선수권자인 신두홍은 남산공전 재학시절 1년 후배인 이창길의 환상적인 테크닉에 밀릴 정도로 복서로써 크게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지만 자신과 함께 운동했던 동료 복서인 정영근이 71년 테헤란 아시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굳게 결심을 한다. 친구 영근이가 테헤란에서 복싱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난 종목을 바꿔 테헤란으로 진출에 성공 해야겠다고.
결국 80년 팔레비 정권시절 이란의 테헤란에 트럭 운전기사로 진출, 4년 동안 악착같이 근무하면서 물경 6천만원을 벌어 귀국한다. 그 후 신두홍은 시드머니(Seed money)를 바탕으로 일가족 6명이 일본에 진출해 당시 국내에선 희귀한 회전초밥 만드는 기술을 6개월동안 배운 후 귀국해 1990년 압구정동에 100여 평의 건물을 임대해 국내 최초로 회전초밥집을 차려 당시 가수 윤향기, 윤복희 남매를 비롯해 농구선수 문경은 등 수많은 인기스타들이 몰려오면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억대연봉자로 자리를 잡는다. 이후 여의도에 한식 당을 차려 입소문이 나면서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정부 참모들이 회식장소로 자주 이용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현재 신 회장은 건축공사를 담당하는 서북스카이연합을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엔 사업을 사위에게 물려주고 이선으로 물러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사업에 성공한 원천은 복싱에서 배운 끈질긴 인내심과 추진력 덕분이라고.
신 회장과 동행한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는 황해남 대표는 73년 제26회 전국학생 신인대회 밴텀급 결승에서 이흥수에 판정패 준우승한 복서였다. 당시 그는 한양공대 1학년 재학생이었는데 운동을 하면서도 주경야독 하며 명문대에 입학했던 경이로운 복서였다. 황해남의 맏딸 황희연 양은 항공대학에 다니다 항공시설이 좋은 한서대학교 항공운항과로 편입해 현재는 대한항공 2500명 조종사 가운데 10여명에 불과한 여성 조종사로 활동중인 재원이고 둘째딸 황희선은 2008년 열린 예산 황토아가씨 선발대회에서 진(眞)으로 뽑혀 수 년 동안 에산 홍보대사로 활동했다며 흐믓해 했다.
사실 복싱인들은 명석한 DNA를 많이들 보유하고 있다. 홍 회장과 옥희여사의 딸 홍윤정이 미국 유수의 명문대를 졸업한 재원이고, 원로권투인 이일호 선생과 동양챔피언 오장균, 3체급 국내 챔피언 최만성 등의 자제 4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또한 세계챔프 전주도의 친동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KIST 대학원 수재이고 채용석 중산체 관장과 중앙심판 이용장의 따님들도 연세대를 졸업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면 복싱인출신 자제들의 명문대 출신들은 차고 넘친다.
아내 이숙은 70년대 데뷔 출충한 가창력과 허스키스한 음색으로 ‘눈이내리네’ 란 곡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어 홍수환이 세계정상에 오르고 옥희가 ‘나는 몰라요’란 곡으로 데뷔하던 1974년 바로 그해 TBC에서 주최하는 제10회 방송대상에서 남자가수 홍민과 함께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우정’, ‘슬픔이여 안녕’, ‘벌서 나를 잊으셨나요’, ‘슬픈 눈동자의 소녀’라는 곡을 발표해 연달아 빅히트시킨 레전드급의 가수로 기자와는 수년 전부터 인연이 되어 친숙하게 지내는 친누님 같은 분이다.
술에 장사 없고 매에 장사 없고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 24살에 첫 세계정상에 오른 홍수환도 이제 70을 훌쩍 넘긴 노신사로 탈바꿈 했다. 이번 홍수환의 타이틀 획득 46주년을 분기점으로 한국복싱이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
조영섭 문화저널21 복싱전문기자
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 현)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전) 82년 로마월드컵 대표선발전 플라이급 우승 <저작권자 ⓒ 문화저널21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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