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의 미학…이시환의 ‘虛空에게 묻는다’에 부쳐

서승석 | 기사입력 2021/03/08 [10:36]

발효의 미학…이시환의 ‘虛空에게 묻는다’에 부쳐

서승석 | 입력 : 2021/03/08 [10:36]

이시환 시인은 너른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이다. 자신의 핏속에 들끓는 야성을 잠재우며, 오랫동안 불경과 성경을 탐색하며 구축한 독특하고 견고한 창을 통해 그는 세상을 본다. 최근 15번째로 상재한 그의 시집 ‘虛空에게 묻는다’에서 우리는 종교를 초월한 열린 시각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시인의 독창적이고 신선한 시세계를 만날 수 있다.

 

칠보로 단장한 궁전이

이슬을 엮어서 지은 

해와 달의 집만 하겠는가.

 

수레바퀴만한 황금 연꽃이

풀잎 끝에 매달린

작은 이슬방울 하나만 하겠는가.

 

‘허공虛空에게 묻는다’ 전문

 

인생무상을 강조한 이 인용시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는 솔로몬의 탄식을 상기시킨다. ‘삶의 무의미함과 허망함을 벗어나려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원전 200년경에 집필된 전도서에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아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신약성서의 누가복음에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온갖 향락과 영화를 누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모든 것을 쟁취한 솔로몬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백합꽃의 아름다움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 시인 이시환(1957 ~      ) 시인, 문학평론가인 이시환은 동방문학(통권 제 97호 발행) 발행인 겸 편집인이며, 시집 13종, 문학평론집 10종 및 기타 8종의 책을 저술했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시환은 ‘칠보로 장식된 궁전’과 ‘수레바퀴만한 연꽃’은 불경에서 차용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같이” 보아야 한다는, 최초의 한역 불경으로 알려진 ‘사십이장경’의 마지막 구절의 각인과, 붓다의 키워드인 ‘허공’이 함께 만나 시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견고한 것들조차 끝내는 다 무너지고 마는 것이며, 실제로는 형태가 없는 관념에 지나지 않으나, 설령 있다 손치더라도 쉬이 사라지고 생기는 이슬방울만 못 하다는 주관적인 심상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불경과 성경의 진수가 이 시에서 절묘하게 만나고 있다. 

 

등산을 즐기는 이시환의 또 다른 시 ‘오늘 문득’에서는, 무한한 공간에서 무소유를 꿈꾸는 구도자의 자세가 엿보인다. 

 

우주를 내 집의

정원쯤으로 여기고서 꿈을 꾸다 보니

 

오늘은 북한산도

화분 하나에 쏙 들어오고

 

‘오늘 문득’ 부분 

 

그러나 무소유를 꿈꾸는 인간이 과연 생명의 원천인 욕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시 ‘가던 걸음 멈추어서서’에서 시적 화자는 타오르는 욕망을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욕, 욕(慾) 아닌 게 없구려.

 

모든 것이

치솟는 불길이다.

 

화창한 봄날에는

죽어가는 것들조차도

 

솟구치는 불꽃이자

욕, 욕이로구나. 

 

‘가던 걸음 멈추어서서’ 전문

 

이시환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연작시에서 욕망을 다 내려놓고 “끝내는 그 가벼운 눈꺼풀조차 들어 올리지 못”(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2)하시던 부친의 인생의 끝자락의 측은한 모습을 지켜보며 “의욕은 많은 근심 걱정과 즐거움을 안겨주지만/그것이 없으면 죽음을 재촉한다”(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1)는 사실을 목도한다. 

 

한편, 시 ‘그녀의 충고’에서 시인은 글을 짓는 시적 고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살고 싶다던

그녀가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팬티의 늘어진 고무줄 같은 시 그만 쓰고

초심으로 돌아가 탄력 있는 시를 쓰라”고.

 

‘시에서의 탄력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싶었으나

묻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심하게 변비 걸린

남자의 똥 같은 시를 쓰라”고.

 

돌이켜보면, 아무런 맛이 없는 물처럼,

물에 넣으면 곧 풀어져 버릴 훍덩이처럼 살아온

나는 평생 시를 쓴다고 써왔으나

돌연, 앞이 캄캄해졌다. 

 

‘그녀의 충고’ 부분

 

이미 ‘毒舌의 香氣’(이시환의 첫 번째 평론집)를 거쳐 온 시인에게 들려준, 혀 짧은 필자가 소위 풍風자를 보고 “나는 ‘바담  풍’ 할께, 너는 ‘바람 풍’ 해라”는 식의 주제넘은 충고가 이토록 큰 충격을 주었다니 내심 미안할 따름이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설사를 하듯이 다작을 해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요, 좀 더 시에 대한 경외심을 갖으라는 의미로 건넨 동료로서의 권유의 말이었다. 시와 평론을 겸하면서, 자신의 시도 제대로 못 쓰면서 남의 시에 대해 논해야하는 필자의 모순과 애로사항을 토로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나누었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대화로 기억한다. 다행히 이 독설을 계기로 이시환은 ‘서시’에서 “내 평생 쉬지 않고 문장 빚어왔는데/부끄럽구나. 심히 부끄럽구나”라고 밝히듯 시에 대한 태도가 한층 겸허해진 것으로 보인다. 시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시를 더욱 잘 쓸 수 있게 되리라는 확신을 입증해준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집 아랫목에는 늘 포대기에 감싸여 신주단지처럼 할머니가 모시고 있던 항아리가 있었다. 할머니가 술밥을 시루에 쪄서 채반에 식힌 후, 누룩과 비벼 섞어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부어 따뜻하게 모셔놓으면, 그 요술단지에서는 차츰 뽀글뽀글 술이 익어가는 음악소리가 들리고 향기롭고 묘한 술 냄새가 방안 가득 퍼졌었다. 그렇게 빚어진 동동주와 막걸리는, 대문을 늘 열어놓고 살다시피 했던 우리 집에 시도 때도 없이 오다가다 들르시는 동네어른들의 큰 기쁨이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좋은 시란 이 추억 속의 동동주처럼 발효되고 익어가는 과정을 거친 시상과 사유라야 한다. 

 

즉 서술체로 풀어놓은 일기체 형식의 꼬드밥이나 설은 밥 같은 시가 아니라, 상징과 메타포가 풍부한 사유의 흔적이 깊은, 발효된 시를 필자는 선호한다. 다시 말하자면 시에서는 1+1이 2만 아니라, 3도 되고 5도 되고 9도 될 수 있다.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가 그렇듯이,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또한 그 상상력을 자극하여 연금술적 화학반응을 일으켜 독자를 취할 수 있도록 해야만 훌륭한 시라고 본다. 이 인용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은 아직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는 그저 내 눈과 내 그릇 속에 담기는/내 삶의 진실일 뿐”이라 결론짓고 있는데, 시가 자신만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려면 굳이 지면에 발표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자신의 책상 서랍에 넣어서 혼자서 보면 그만 아닐까? 

 

시는 물론 일기처럼 매일 자신의 삶의 진실을 직설적으로 써내려가도 되겠으나, 더 좋은 시를 위해서는 적어도 감정을 삭이고 시상을 가다듬고 형식을 갈고닦으며 시가 익어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적어도 독자에게 읽혀지고 독자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기를 원한다면, 시인은 자신의 고유성이 우주적 보편성을 만나 공감대를 획득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적어도 시인은 내용뿐만이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지 말고, 독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새롭게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야심한 밤에 잠을 깨어 읊조리는 “순백의 고요가 드리워져 있고/백지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길을 잃고 제자릴 맴돈다”(폭설이 내리던 날 밤)는, 작가로서의 백지 앞의 고독을 담은 시인의 고백이 뼈아프게 들린다.

 

이시환의 지적 호기심은 요즈음 주역으로 옮겨갔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Il meurt lentement celui qui ne voyage pas, celui qui ne lit pas, celui qui n’écoute pas de musique, celui qui ne sait pas rire de lui-mê̂me.”라고 파블로 네루다Pable Neruda는 말하였다. 항상 구르는 돌처럼 고행과 정진을 계속하고, 다방면으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이시환은 앞으로 그가 추구하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오래오래 살아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승석(문학평론가·시인)

 

▲ 서승석 미술평론가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평론가(문학·미술)이자 시인 서승석 불문학 박사는 1995년 시집 ‘자작나무’ 출간으로 시작 활동을 시작해 2013년 ‘유심’ 평론부문에 등단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4-소르본대학교에서 비교문학 석사,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자대학교, 수원대학교 겸임교수 및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자작나무’, ‘흔들림에 대하여’, ‘사람 사랑’, ‘그대 부재의 현기증’과 번역서로 파블로 피카소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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